权香花
2021-07-12 15:03:3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7월 8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두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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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지난 1일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북경을 비롯하여 중국 각 지역에서 여러 가지 경축행사가 진행된 가운데 여러 나라 정치요인들과 학자들은 중앙방송총국 기자의 특별취재를 받은 자리에서 습근평 총서기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경축대회에서 한 중요한 연설을 높이 평가하고 중국공산당 창당 백년 이래의 빛나는 성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7울 1일의 경축행사에 즈음하여 한국 김연준 청취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간주 청취자 내신]

“CRI 홈 페이지를 통해 당 성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다양한 행사관련 소식을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7.1 훈장이 중국 전통 디자인에 기반해 수공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지는 과정을 잘 소개해 흥미로웠습니다.

당 최초로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7.1훈장 수여식에서 습근평 주석은 인격의 힘을 갖추어야 국민의 맘을 사로 잡을 수 있으며 순수하게 살고 깨끗하게 일해 청렴결백한 자세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7월 1일 100주년 경축대회가 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데 저도 CRI 보도에 계속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위대한 성과들을 새로운 세기에도 계속 이어나가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 연준“

네, 7.1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에 즈음하여 전국 각지에서 형식이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한 활동이 진행되어 창당 100주년 경축행사에 짙은 분위기를 이뤘고 당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길림성 왕청진에서는 창당 100주년 광장문예 경연 행사를 진행했다고 왕청현 리강춘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6월30일 저녁 다섯시 반에 길림성 왕청현장길도로천광장에서 왕청진문예경연이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왕청현 왕청진문화소 소장 오홍란이 주최한 이번 경연에는 평균 년령이 60세이상인 400여명 로인들이 우리민족의 명절복장을 차려입고 선후로 무대에 올라 대합창, 북병창, 독창, 무용, 사물놀이 등 다양한 문예종목을 표현해 현당위선전부, 현문련, 현로간부국현로년체육협회, 현로령반공실 등 상관부문책임자와 2000여명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 

 왕청촌의 대합창 <<동방홍>>,《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도 없다》로 막을 연 이번 경연에서는 대천촌의 남녀혼합무용 <<장고야 울려라>> 동명촌의 무용 <<아름다운 진달래꽃>>,동진촌의 무용 <<대해항행의 조타수>>등 17가지 종목은 중국공산당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고 당과 조국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당의 생일을 맞으며 기쁨으로 차넘치는 왕청진로인들의 정신면모를 충분히 구현하였다.“

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에 즈음하여 시골 마을에도 국기가 휘날렸다고 중국 길림성 연길시 박철원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창당100주년을 맞는 길림성 연길시 춘흥촌 신광5대 마을 어귀에 진붉은 오성붉은기가 휘날렸다.

이 기발은 올해80세인 렬사의 후예 김채봉할머니가 소중히 소장한 기발이였다.

뜻깊은 명절을 맞이하는 6월29일 아침, 김할머니는 기발을 들고 신광5대 대장 (촌민소조장)김종학을 찾았다.

“우리 마을도 당의 덕분에 부유해졌는데 위대한 나라를 자랑하기요”

촌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며 휘날리는 오성붉은기아래에서 위대한 당이 없으면 오늘이 없다며 부유해진 새 마을을 지켜가는 자신들을 자랑하며 행복한 생활을 노래하였다.“

박철원 청취자는 또 연길에서 ‘옛 부락 문화원'이 정식 오픈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6월29일, 연길 춘흥조선족 옛부락문화원이 정식 오픈하였다.

연길 모드모아 온천유원지와 자리를 나란히 한 이 문화원은 15만평의 부지에 4천여평 시설과 40여채 조선족전통가옥을 가추어 <웰빙음식관>, <전통가옥 힐링숙소>,<생태채집체험>,<민속체육과 농악무>,<낙시터와 어리이놀이터>등 시설이 갖춰져있는 전통문화교류장이다.

긴시간의 시운영을 걸쳐 시설과 봉사시스템을 더 완벽하게 꾸려 정식 오픈하게된 특색있는 레저공간이다.

이날 이 문화원에서는 춘흥촌 전체 촌민들을 한자리에 청하여 옛부락의 정취를 함께 나누며 새로운 모습으로 특색있는 문화원을 손잡고 꾸려나가기를 기약하였다.“

[간 주]

그럼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재미있는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 걸만(杰滿)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걸만의 채 꺼내지 못한 이야기

  길가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던 촌민들은 그 동네를 ‘걸만’이라고 불렀다. 마패 북쪽으로 5리 정도 상거한 동네였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었더니 “호걸이 많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중국말로 준걸 걸杰, 찰 만滿 자를 쓰니 그럴 법 한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일찍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개발되었으며 ‘걸만’이라는 마을은 그 후인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에 생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호걸들의 이름과 경력 등은 마을이름처럼 그렇게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고 하는 리덕송(83세) 옹은 더구나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걸만은 예전에 (혁명)열사들이 많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리덕송 옹은 8살 때 두만강 대안의 온성에서 부모를 따라 걸만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때 집은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이 가난했다. 걸만에 먼저 정착했던 삼촌의 권고로 마침내 도강을 작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동네를 토암土岩이라고 부르고 있었지요.”

  토암은 훗날 걸만촌 5대(隊, 촌민소조)로 개편, 걸만이라는 마을을 이룬 여러 동네의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방문헌은 광서 9년(1883) 토암 동네가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네의 뒷산은 풍화된 암석 구조이며 흙이자 또 암석이어서 토암이라고 작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덕송 옹의 가족이 이삿짐을 풀던 그 무렵 벌써 내력이 싹싹 지워지고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되고 있었다.

  “우리 이 동네의 위쪽에 바위벼랑이 있다고 해서 토암이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그 바위벼랑은 일명 ‘여시바위’라고 불리고 있었다. ‘여시’는 ‘여우’를 이르는 강원도, 전라 지방의 방언이다. 예전에 누군가 바위벼랑 위에 앉아있는 여우를 보고 지은 이름인 듯하다. 벼랑에는 지금도 날짐승이 깃든다고 하니 여우가 자주 들락거렸을 법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뉘라 없이 ‘여시’가 우리말 방언인줄 모르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여시바위’를 아주 난해한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정말 약과인 것 같다. 걸만 마을의 제일 바깥쪽에 위치한 1대 뒷산의 이름은 아예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촌장 저택에서 만난 50대의 아낙네는 그가 시집을 오던 그 무렵 벌써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집 동쪽에 있는 저 둥그런 산인데요, 다들 ‘산스 가슬’이라고 부르지요.”

  처음 듣는 이름이고 또 하도 괴이한 이름이라서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그런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솔직히 외국말을 옮겨온 듯한 ‘산스 가슬’의 이름은 그냥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던가, 나중에 촌민 하나가 우연히 건네는 말 한마디가 우뢰처럼 귀를 번쩍 울렸다.

  “무슨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스 가슬’에는 참나무가 많이 자라지요.”

  “물 따라 강남으로”라는 말이 있듯 “더덕 따라 참나무 숲으로”라는 말이 있다. 참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더덕줄기가 묶음이 되고 더덕 씨가 줄레줄레 떨어져서 더덕 밭을 이룬다. 더덕의 방언이 ‘산승’이고 숲의 방언이 ‘가슬’이니 ‘산스(승) 가슬’은 결국 ‘더덕의 숲’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이처럼 지명이 원체 방언으로 만들어진 줄 모르고 있었고 또 그 방언마저 비슷한 음으로 와전되다 보니 마을에는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할 괴상한 지명까지 생기고 있었다.

  1대 마을을 이르는 ‘사무구파’가 바로 그러했다. 자칫 일본말로 오인할 수 있는 지명이었다. 마을 토박이인 리덕송 옹도 웬 일인지 ‘사무구파’로 기억하고 있었다.

  실은 ‘샘물구팡’이었다. 구팡은 우리말 방언으로 처마 밑에 마루를 놓을 수 있게 쌓아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때는 (샘물) 근처의 높은 지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닐세라, 마을 뒤에 큰 샘이 있으며 이 샘 때문에 마을은 중국말로 샘물이라는 의미의 ‘천수泉水’라고 불리고 있었다.

  남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자부락골’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부락골’은 골짜기에 해가 뜨는 시간이 짧아서 잠만 자는 동네라고 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부락’은 소리를 나타내는 말. 그러니 ‘자부락’은 응당 ‘잠부락’의 와전으로 보아야 한다.

  자부락이든 잠부락이든 인가가 죄다 사라졌으니 진짜 잠을 자는 골짜기로 된 셈이다.

  자부락골처럼 소실된 부락은 또 하나 있었다. 토암의 바로 서쪽에 있었던 동경동東京洞이다. 광서 초년에 생긴 이 부락은 불과 수십명이 살던 작은 동네였다. ‘동경’은 물소리 혹은 시냇물을 이르던 만족 말이라고 한다.

  와중에는 에덴동산을 연상케 하는 지명도 있었다. 신선이 내려왔다고 전하는 ‘신선 더기’였다. ‘신선 더기’는 현재의 걸만 2대 마을로 닭 덕대 같은 둔덕에 제를 지내던 곳이 있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북좌남향한 이 비탈에 바람이 잘 통하고 또 공기가 시원하여 신선 같은 곳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기왕 지리위치로 생긴 마을의 이름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일명 큰 마을, 대대마을로 불리는 4대 마을은 이름하여 남양툰南陽屯이다. 산의 양지 바른 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광서 7년 개발되어 광서 10년에 형성된 이 마을에는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이미 폐교되었다.

  인제 지명마저 학교처럼 허울뿐인 이름 그 자체로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리덕송 옹의 아내 김보금 로인은 마을의 옛 이름이 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기억이라는 그릇에 지명 이야기를 담을 여유도 생각도 없는 듯했다. 로인은 그의 고향이 걸만 북쪽의 립봉笠峰이라고만 말했다. 립봉은 우리말로 삿갓봉을 중국말로 옮긴 말이다. 진짜 마을 부근에는 삿갓 모양의 산이 있다고 한다.

  그가 살고 있었던 삿갓봉은 물론이요, 부모님의 옛 고향은 로인에게 더구나 아득한 옛말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린 두만강 저쪽에서 건너왔지요. 그러나 언제 어디서 건너왔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이 잃고 있는 건 아리송한 옛 기억뿐만 아니었다. 그날 우리는 마침 뜰에 들어서는 리덕송 옹을 만났을 때 인사보다 놀라움을 앞세워야 했다. 그가 몇십리 밖의 도문 시가지에 가서 몸소 쌀 200근을 택시에 싣고 왔던 것.

  현지의 참담한 실상을 보여주는 단면도였다. 농사꾼이 땅을 떠나고 있었고 인가가 자리 나게 줄어들고 있었다. 전성기에 수십 가구에 이르렀던 토암 마을 역시 인제 20가구 정도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지금 마을의 옛날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어쨌거나 이곳의 동네는 거개 조선말 방언이 아니면 지리적 위치로 인한 지명을 갖고 있었다. 여러 동네를 하나로 묶은 걸만도 실은 조선말 방언에 연원을 두었다는 설은 예전부터 있었다. ‘걸만’은 방언 ‘거르만’을 중국말로 옮기면서 비슷한 음의 ‘걸만杰滿’으로 되었고 그걸 다시 “호걸이 많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르만’은 연변지역의 조선말 방언으로서 호주머니라는 의미의 러시아 말 ‘까르만’에서 비롯되었다.

  이 설법을 억측이라고 하기 어렵다. 하긴 예전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를 통해 간도 지역으로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러시아 말의 어휘가 이민들에게 풀씨처럼 묻어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연변에서 늘 사용하는 어휘 “비지깨”는 바로 러시아어로 “성냥”이라는 뜻이며 “마션”은 러시아어로 “재봉틀”을 이르는 말이다.

  걸만을 조선말 지명으로 해석하면서 실은 ‘걸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걸망’은 걸머지고 다닐 수 있게 얽어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를 말한다.

  실제 마을은 위치가 바로 골짜기 사이에 갇혀 있어서 흡사 긴 주머니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호주머니의 ‘거르만’이나 큰 주머니의 ‘걸망’으로 해석해도 십분 가능하다는 것. 또 심산벽지의 이 고장에서 호걸이 있었다고 해도 부인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한다.

  도대체 ‘걸만’은 두만강 대안의 사람들이 걸망을 메고 건너와서 지은 이름일까, 아니면 연해주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온 러시아 말의 지명일까. 또 옛날 마을을 빛낸 호걸이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일까…

  잠깐, 재미있는 지명이 하나 있다. 바로 걸만 끝머리에 있는 ‘삼동三洞’이다. 얼핏 이름만 보아서는 세 개의 동굴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기실 광서 초년 마을이 세 갈래의 골짜기가 모이는 어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으로 시초에는 세 개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삼구三溝’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게 어찌어찌하여 ‘삼동’으로 와전되었고 지어 한발 더 짚어서 산의 동굴이라는 의미의 ‘산동山洞’이라고 군사지도에 기록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걸만 역시 이 삼동이라는 이름처럼 뭐가 뭔지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종내 찾을 길 없었다. 마을의 집단기억에 더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네, 지명 걸만에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주머니에 넣었던 물건처럼 걸만에 담긴 이야기들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비로소 빛을 내는 것 같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에는 ‘팔도’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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