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7-16 20:30:05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7월 1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세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

1. 7월

14일 수요일은 실버 데이, 즉 은빛 연인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날 사랑하는 사람을 집에 데려가서 부모와 대면을 시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어르신에게 소개한다고 합니다.

이 연인의 날, 두 연인은 은으로 만든 선물을 서로 선물하기 때문에 연인의 선물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전통적인 풍속에 은반지를 손가락에 끼어 감미로운 심정의 증거로 삼습니다.

[간주]

지난 1일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전국 각 지역에서 다양한 경축행사가 벌어진 가운데 길림성 장춘에서 애청애독자들이 경축모임을 가졌다고 김수금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간주 청취자 내신]

청취자의 벗 담당자님에게

안녕하십니까? 무더운 삼복철이 다가왔습니다. 열화 같은 무더움 속에서 편집하고 방송하시느라 여러분 수고가 많습니다.

지난 6월 27일 장춘제일자동차그룹 조선족노인협회와 장춘애청애독자클럽 제일자동차그룹분회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연합하여 정채로운 문예공연을 조직했습니다. 공연에 참석한 대부분의 노인들은 7,80세로 파란만장한 당의  많은 노정을 직접 보고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날 공연한 노래 한수, 시 한 구절, 무용 하나에는 모두 당에 대한 충성과 무한한 열애로 넘쳐흘렀습니다. 도합 22개 종목이었는데, 모두 정채로웠고 정열에 넘쳐흘렀습니다.

여성 공산당원들이 표연한 무용 "우리 함께 중국 꿈을 이루자"가 공연의 막을 올렸습니다. 춤은 내용이 깊고 동작이 아름다웠습니다. 춤은 감동적이어서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남성 당원들의 소합창 "동경", "우리는 큰길에서 달린다"는 중국공산당의 영도아래 중국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내달리는 중국인민들의 기백을 우리 앞에 보여줬습니다. 우렁차고 기세 드높은 이 노래는 흡인력이 컸습니다. 그리고 전체 당원들의 대합창 "동방홍", "우리 함께 신시대에 들어서자"는 고 모택동 주석의 위대한 업적을 연상시켰으며 이와 더불어 습근평 신시대 부흥의 길에서 힘차게 달리면서 새 편장을 엮을 당원들의 결심과 신심을 북돋아주었습니다.

장춘애청애독자클립 전체 성원들은 또 합창 "당의 빛발이여", "애청애독자클럽의 노래"로 당의 빛발 아래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의 깊은 감명을 담아서 표현했습니다. 특히 '애청애독자클럽의 노래'는 애청애독자들이 글과 말을 지켜가며 후손만대 전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굳은 의지를 표달하여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애청애독자클럽의 박룡익 선생의 자작시 랑송 "송가를 당에 드리네", 김수금 여사의 시랑송 "위대한 당이여"는 중국공산당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고 당을 열애하는 그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읊어 자주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표연창 "공산당의 은덕일세"는 당이 있었기에 오늘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했습니다. 박룡익 선생의 조롱박 퉁소연주는 아름답고 아주 서정적인 강서 민요였는데 노래와 무용을 곁들여 절찬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장정의 길에서 백성들이홍군을 애대하는 그 정경을 눈앞에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가무 "송가를 당에 드리네"는 제3조 전체 조원 30명의  노래와 춤 형식으로 묶은 종목이었는데,  장내에 당기를 휘날리며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밖에 여성 독창과 남성 독창, 건강체조 댄스, 단체무용, 소합창, 북춤 등은 내용이 아주 풍부하였는데 주제는 단 하나 중국공산당의 업적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체 회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네"를 소리 높이 부르면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과 열애를 표현했습니다.

문예공연에서 우리는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는 이 역사의 진리, 불멸의 진리를 명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두번째 백년 목표에 이르는 길에서 새로운 편장을 열기 위해 다함께 힘차게 나아갈 결심을 내렸습니다.

7월 12일

장춘애청애독자클럽 제일자동차그룹 김수금”

 

네, 7월 1일의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의 날은 지났지만, 붉은기가 곳곳에서 나붓기고 즐거운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던 그때의 환락의 열기는 아직도 어디서나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김수금 청취자의 좋은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를 읽어드렸습니다.

[간주]

그럼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재미있는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의 와룡동 지명 이야기입니다.

 

용이 살던 마을 와룡동

옛날 골짜기의 어구에 있는 마을은 상발원祥發源이라고 불렸다. 광서(光緖, 1875~1908) 연간 한韓 씨 성의 사람이 마을에서 술을 빚었는데 그 술의 상호가 바로 ‘상발원’이었다고 한다. 이 술의 상호를 패쪽처럼 걸어놓은 마을은 자의든 타의든‘주막’으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

이 주막의 이름은 나중에 민흥촌民興村으로 바뀌었다. 민흥촌은 1958년 대약진大躍進 운동 때 지은 이름으로 인민이 흥성, 번영한다는 뜻이다.

정작 술의 향긋한 기억은 흙길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먼지에 묻히고 있었다. 그런데 흐릿한 그 기억마저 미처 퍼즐을 맞출 사이가 없었다. 누군가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또 잔등에 따끈하게 맞혀왔기 때문이다.

“차가 갑니다. 길을 좀 비켜주세요~”

뒤미처 자전거 한 대가 휭 하니 곁을 지나 골짜기로 달려간다. 안장 앞뒤에 달아놓은 플라스틱 통들이 우둥탕 맞부딪치면서 어지러운 장단 소리를 길가에 떨어뜨렸다.

저만치 걸어가던 길손이 푸념 삼아 던지는 소리는 먼지처럼 자전거를 쫓아갔다. “참 급한 사람이구먼. 그 사이에 샘물이 다 마를까?”

알고 보니 골짜기의 막바지에 샘물이 있단다. 물맛이 좋다고 소문나서 물 긷는 사람들이 늘 줄을 서고 있었다. 예전에 그 샘물로 빚었던 술은 맛이 정말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덩달아 골짜기로 향한 일행의 걸음이 바빠졌다.

5리 정도 걷자 밭머리의 쑥대 사이에 석물 하나가 언뜻 나타났다. ‘와룡촌’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금은 민흥 3대(隊, 촌민소조)와 4대, 예전에는 와룡동臥龍洞이라고 불렸던 옛 동네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와룡동은 동네 서쪽에 웅크리고 있는 산이 마치 커다란 용 한마리가 뒤틀고 누워있는 듯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석물 뒤쪽의 농가에 가서 기척을 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혼자서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 잡동사니가 널린 구들에는 아들의 전화번호를 적은 하얀 종이장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자식들은 모두 시내로 진출했고 그가 홀로 고향집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대륙 시골의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속도였다.

“소를 살찌우려면 산에 보내고 사람이 출세하려면 시내에 가야 하지요.” 김동욱 옹은 일행의 안쓰러운 눈길을 읽었는지 이렇게 변명조로 말꼭지를 뗐다.

실제 그의 부친이 도문 서쪽의 위자구葦子溝 일대에서 연길 근교의 와룡동으로 이사를 올 때에도 이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위자구는 광서 초년에 형성, 사면이 산에 둘려있다고 해서 보루와 같다는 의미의 ‘위자구圍子溝’로 작명되었다. 훗날 갈대 위葦자가 에울 위圍자로 쓰이면서 ‘위자구葦子溝’로 되었던 것이다.

위자구는 지명조사를 하던 1982년경 1천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부터 도시진출이 본격 시작되면서 토박이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떴고 이어 외지인이 들어와서 빈자리를 메웠다.

솔직히 김동욱 옹의 부친이 남부여대하고 고향 함경도 어랑군을 떠날 때는 꼭 시내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말이 밭이지 돌무지나 다름없었다고 하지요. 돌을 번지면서 기음을 맸다고 합니다.”

그때 두만강 건너 쪽 미개척지의 간도는 희망의 땅이었다. 미구에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위자구 일대에 와서 거처를 잡았지만 가난한 살림은 종내 펴이지 않았다. 기왕에 산골에서 살 팔자라면 도회지 냄새라도 맡아야 된다면서 다시 이삿짐을 싸들고 찾은 고장이 이 와룡동이었다.

와룡동은 19세기 말 함경북도의 간민들이 들어와서 개척한 마을이다. 일찍 1907년 벌써 80세대가 사는 큰 동네로 되고 있었다. 이 무렵 기독교인 오상근, 이병휘, 남성후 등은 민족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와룡동에 창동彰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또 중학부를 부설하고 학교이름을 “사립창동중학교”로 명명하였다. 당시 학교에는 학생이 100여명 되었는데 외지의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중에는 멀리 조선과 연해주 일대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는 신학교육과 반일교육을 실행한 동시에 군사과목을 설치, 훗날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해 많은 군사인재를 육성했다.

그러나 김동욱 옹이 와룡동으로 이사를 왔을 때 창동학교는 옛 건물의 흔적만 가까스로 남기고 있었다. 1920년 경신년庚申年 일본군의 토벌 때 학교 건물이 죄다 불타버렸고 대부분의 교원들은 외지로 떠났던 것이다. 1935년 창동학교의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여 세운 ‘사은師恩기념비’가 옛날의 번성했던 학교의 모습을 마을 동쪽의 산비탈에 얼추 그려놓고 있었다.

창동학교는 8.15 광복을 맞은 후 다시 와룡동에 부활한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서쪽 산비탈의 옛터를 버리고 마을 북쪽의 평지에 따로 학교 건물을 세웠다. 김동욱 옹은 어릴 때 새로 지은 이 창동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학교를 내놓고 또 과외처럼 즐겨 다니던 곳이 있었다. 그와 또래들은 예배를 보는 날이면 학교 북쪽에 있는 교회당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전 씨 성의 집사가 우리 아이들을 모여 놓고 재미있는 옛말을 들려줬지요.”

교회의 전집사는 조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 전함을 물리치던 이야기 등을 구수하게 풀어놓았다고 한다. 서적이 금처럼 귀하고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었던 시골에서 정말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았다.

조선인 이민들의 최초의 민족계몽운동과 반일운동은 이처럼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었던 것이다.

간도에서 선교활동은 조선인 간민墾民들의 대량이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는 북간도에 선교사와 전도자를 파송, 1906년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뒤미처 용정의 기독인이 간도의 조선인 전도를 위해 멀리 함경도 원산까지 가서 기독교 서적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도가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7년 남감리회는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 장로회는 김문삼을 간도에 파송한다. 이화춘은 와룡동교회, 이응현은 모아산교회를 설립하며 장로회는 용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모아산은 와룡동 골짜기에서 바로 정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둥그런 산이다. 1915년 경 간도에 36개 교회가 개척되며 또 교회의 주도로 많은 학교가 세워진다.

간도지역 최초의 민족운동단체인 ‘연변교민회(훗날 국민회로 개칭)’는 기독基督 인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국민회를 통한 기독인들의 반일운동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양성 등으로 이어졌다.

바로 창동학교에 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대한청년회 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졸업생들은 철혈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용정 선바위 부근에서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15만원탈취사건’의 골간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반일지사들은 모두 와룡동 출신이다.

와룡동에서 교세는 연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 광복 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미구에 철거의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김신숙(1938년 출생) 노인이 와룡동으로 시집을 오던 1956년에만 해도 와룡동교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김신숙 노인은 바로 와룡동교회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선 것은 아니었다.

“그때 교회는 이름뿐이었지요. 벌써 예배를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십 평 크기의 교회건물은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어있었다. 김신숙 노인의 시집은 마침 길 건너 바로 서쪽에 있는 이 널찍한 교회당을 예식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특이한 인연이 이어졌는지 김신숙 노인은 지금 독실한 교인으로 있었다. 그는 지병 때문에 운신이 불편했지만 교회당 옛터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고 하면서 기어이 안내를 나섰다.

우리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와룡동의 제일 북쪽이었다. 거기에는 고층건물의 휴양소가 땅을 박차고 일어서고 있었다. 이 휴양소 앞마당의 동쪽 귀퉁이가 바로 교회당 옛터였다. 옛터에는 시공현장의 철근과 나무 조각 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민흥촌의 직속마을이었던 과수마을도 어느덧 집단기억에서 소실되고 있었다. 과수마을은 일명 5대 마을로 서쪽의 고개 너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예전에 동쪽의 와룡동과 짝을 맞춰 와호동臥虎洞이라고 불렸다는 속설이 있다.

이쯤하면 누군가는 대뜸 와룡동과 와호동을 두고 좌청룡이요 우백호이요 하면서 풍수설을 들먹거리겠지만 실은 이 지명이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기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와룡동 마을에 영웅호걸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샘물은 와룡동의 동쪽 골짜기에서 예나 제나 변함없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샘물을 마시던 용은 단지 지명에 화석으로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에는 ‘팔도’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네, 중국 길림성의 청취자들이 퀴즈 답안을 이렇게 적어서 보내왔 습니다.

“마을에는 천주교가 자리 잡은 곳이라서교민들이 많았습니다. 이민들이 오가면서 여덟번째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해서 '팔도'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답을 보낸 사람들로는 김수금,라명희, 주송숙, 량두봉, 박숙녀, 오애화, 주혜숙, 리명희, 한란희, 김금녀, 윤영선, 박룡익, 박영희, 방태석, 정성갑, 정기순, 권도관 등입니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박철원 청취자도 퀴즈 답안을 보내왔습니다.

답안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달의 퀴즈에는  팔도 지명이  나왔는데  이  이름은  연길  서북쪽  태양벌에  아홉갈래 의 물이  합쳐서  흐르는  구수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슭의  여덟 번째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팔도(八道)라고  지었답니다.

지금의  팔도촌은  새농촌건설의  힘을  입어  옛날  장화를 신고  기생집에  다녔다는  초가부락이  사라지고  콘크리트길이  쭉쭉 뻗고  멋진  가옥들이   줄 이은   멋지고  깨끗한  마을이 되였습니다.

팔도하면  천주교 교회당을  련상하게  되는데  역시 깨끗한  건물에  꽃도  곱게  심은  정원에  철대문이  달려 있고,  사시장철  오성붉은기가  높이  날리고 있는 것도  특색있는  풍속도라서  유람객들의  감탄을  자아내지요.

바로  천주교당 옆으로  연길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가  신축되어 있습니다. 고속도로로  오가는  버스에서  사람들은 교회당  건물과  거기에 높이  걸려있는  국기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  우리  로인뢰봉반에서는  삼도만 혁명유적지  답사차로  디녀 오던 길에 팔도에 놀랍게 변화된  팔도촌의  풍경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네, 이달의 퀴즈 답안은 다음달의 첫 목요일 방송 프로그램“청취자의 벗‘에서 말씀드립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
기타 플랫폼
CMG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