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7-23 16:17:4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7월 2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네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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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이번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재미있는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팔도의 일부 마을 지명 이야기입니다.

까마귀바위에 울린 빨찌산의 나팔소리

 

밤이면 늘 울리는 신호 나팔소리는 일본 군경들에게 진짜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나팔소리는 팔도구에서 북쪽으로 몇리 상거한 까마귀바위에서 띠띠- 따따- 하고 울렸다. 까마귀바위는 바위에 까마귀가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까마귀 대신 수림의 범처럼 무서운 “빨찌산”이 찾아올 줄이야!

“나팔소리가 울리면 팔도구(八道溝)에서는 다들 불안에 떨었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현지 토박이 오정묵씨의 말이다.

오정묵씨는 팔도구 북쪽의 오봉촌에서 나서 자랐으며 훗날 팔도구에 이사하였다. 동네 로인들은 삼삼오오 마당에 모여 앉으면 나팔소리의 이야기를 담배연기에 새뽀얗게 피워 올렸다고 한다.

“일본 경찰과 자위대는 빨찌산이 산에서 내려와 팔도구를 습격하려는 줄로 알았다고 하지요.”

실제 1933년 9월, 연길현유격대는 자정 12시에 팔도구에 있는 일본경찰분주소와 무장자위대를 습격하여 여러 명을 사살했으며 또 총과 천, 곡물 등을 탈취하고 군용트럭 2대를 소각했던 것이다.

연길현 팔도구는 국자가(局子街, 현 연길시) 서북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서 예전에는 시가지 못지않게 번화한 고장이었다. 개간 초기 조선인 간민들이 천주교 교회당을 세우면서 북간도 선교의 중심지로 되고 있었다. 게다가 서쪽의 명월진과 북쪽의 왕청으로 통하는 길목 어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팔도구에는 항일유격대의 근거지가 있었다. 1932년~1936년 기간 연변지역에 설립되었던 11개 항일근거지의 하나였다. 팔도구 북쪽의 마을 부암촌(符岩村)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세운 항일투쟁기념비와 항일유격근거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부암촌은 항일유격대가 자주 리용하던 부호의 바위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항일전쟁승리를 기념하여 장승촌(長勝村)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유격대는 훗날 현지인들에 의해 “김일성부대”라고 불린다. “김일성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 독립사단을 이르던 별칭이다. 제2군단 독립사단은 연변 각 현의 유격대를 통합하여 설립한 부대로서 부암의 항일근거지에 있던 유격대도 여기에 망라된다.

연길현 8구(區) 소베트정부는 바로 부암촌 북쪽으로 약 3리 정도 상거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부암촌 어구의 둔덕에 위치한 “개똥바위”에 초병을 두었다고 한다. “개똥바위”는 자그마한 돌들이 흡사 “개똥”처럼 마구 엉켜 큰 벼랑바위를 이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바위에 올라서면 팔도구 방면에서 부암촌 일대로 들어오는 산길을 멀리서도 손금처럼 환하게 살펴볼 수 있다. “개똥바위”는 특이한 지형 우세 때문에 유격대의 천연적인 망루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팔도구에는 부암처럼 항일유격대의 흔적이 지명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팔도구를 흘러 지나는 강은 워낙 양지바른 남쪽을 향해 흐른다고 해서 조양하(朝陽河)라고 불린다. 그러나 오정묵씨가 어릴 때 들었던 강 이름은 또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홍하(紅河)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피로 붉게 물든 강이라는 뜻이지요.”

팔도 북쪽의 골짜기에서 일본군이 늘 반일지사들을 무더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선혈이 골짜기에서 시냇물처럼 흘러내려 강물을 벌겋게 물들였다는 것이다. 이 골짜기는 사람이 많이 죽어서 음기가 세다고 “귀신골짜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본군의 피비린 총칼 때문에 무덤처럼 음산한 곳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팔도구 북쪽을 병풍처럼 가로막은 거북이산 정상의 벼랑에는 유격대원들이 “일제를 타도하자”라고 쓴 글발이 씌어져 있었다. 산정의 벼랑에는 또 유격대 부상병이 숨어있던 작은 동굴이 있다.

유격대가 근거지를 설립하고 활발하게 움직이자 일본 군경은 송곳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1933년 12월부터 1934년 2월까지 일본 군경은 연길현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대거 벌였다. 항일근거지가 있는 팔도구 일대에는 “토벌작전”이 여러 번이나 진행되었다.

바로 이 무렵 부암촌과 8리 정도 떨어진 길가의 언덕에는 비석이 하나 문득 나타난다.

“일본군이 일부러 세운 위령비(慰靈碑)라고 합니다.” 오정묵씨는 약 40년전 중학교를 다닐 때 식목을 하러 왔다가 처음으로 이 비석을 보았고 또 그때 이 비석의 오랜 유래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때 일본군의 한 군관이 ‘김일성부대’의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하지요.”

비석은 돌들을 키 높이로 쌓아서 만든 기단 위에 세워졌지만, 언제인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로 반죽하여 돌들을 쌓아올린 기단만 홀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기단에는 풀들이 겨끔내기로 자라고 있다.

사실상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비석은 기단 부근에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흙에 묻혀 있는 것 같았는데요, 도구가 없어서 파내지 못했습니다.” 현지를 다녀갔던 연변박물관 전 연구원 리송덕 옹은 이렇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때 리송덕 옹은 항일근거지를 답사하던 걸음에 이곳에 잠깐 들렸다고 한다. 예전에 팔도구에서 싸웠던 항일투사들과 함께 전적지들을 찾았던 것이다.

“시초에는 토벌대 대원들의 무덤 일여덟개가 주변에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리송덕 옹이 비석 현장을 찾았을 때는 무덤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식목 등 인위적인 파괴와 더불어 세월의 흐름속에 자취를 감췄다. 비석도 누군가에 의해 기단에서 분리되었고 뒤이어 바람처럼 가뭇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아무튼 현지인들과 전문가들의 증언 그리고 비석 기단 등 유물로 미뤄 보면 일본 군경의 무덤과 위령비는 분명히 실존한 한 단락의 력사이다.

연변의 “현지(縣志)”, “문물지(文物志)” 등 지방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 세기 30년대 팔도구 부암 부근에는 확실히 일본군 토벌대와 유격대의 교전이 여러 번 있었다. 김순덕(金順德, ?~1934.여름), 왕덕태(王德泰, 1908~1936.11) 등이 인솔한 유격대가 부암 서북쪽에서 토벌대를 매복, 습격하여 여러 명을 사살했으며 또 부암에서 벌인 전투에서 유격대에 의해 토벌대 대원 50여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유격대에 의해 일본 군경이 상당수 사살되었으며 그 때문에 일본군이 그들의 전몰자들을 위해 현지에 무덤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울 법하다는 얘기가 된다.

정작 현장에서 사살되었다고 하는 일본군 군관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격대에 의해 사살된 일본경찰 순사부장이라고 주장한다. 지방의 문헌에 기록된 그가 바로 부암 부근의 전투에서 사살된 제일 높은 계급의 일본 군경이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또 비석의 주인을 두고 이목구비를 오목조목 갖춘 전설이 파다히 유전했다. 그때 일본군 군관은 비석 기단이 현존하는 언덕배기에서 지형을 정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언덕배기는 맞은쪽의 벼랑과 수백미터나 상거한 골짜기의 개활지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 군관은 신변에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말뚝처럼 여유롭게 섰다가 유격대원 명사수의 고정 표적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비문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진 비석은 세간에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현재로서는 벼랑기슭의 수림에 일본군이 세운 비석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실제 비석의 견증인인 오정묵씨도 비석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서 일행과 함께 수림을 거의 한시간동안이나 헤집고 다녔다. 40년전 어릴 때의 그의 기억은 어느덧 발목을 덮는 썩은 낙엽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벌써 80년전에 발생되었던 옛 사건임에랴!

일본군의 옛 비석은 빨찌산의 발자취를 간접적으로 확인, 실증할수 있는 기록물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위령비라고 백안시(白眼視)를 한다면 지나간 력사의 일부를 제멋대로 지워버리는 게 아닐지 한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수림의 적막을 휘젓고 있었다.

 

네, 비석 저쪽의 멀리에서 울리던 빨찌산의 나팔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17년 동안 109개의 동북항일련군 렬사기념비를 세우고 무려 100만자 넘는 동북항일련군 사적을 발굴 정리했으며 사진 5000여장을 수집한 사람이 있습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75세, 조선족)입니다.

 

왕청 이강춘 청취자가 “홍색유전자 전승해 후세들의 비추리이런 제목으로 전국우수공산당원 김춘섭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 보내왔습니다.

 

[간주]

 

     17년 동안 정부부문의 자금 1300여만원을 지원받아 109개의 동북항일련군 렬사기념비를 세우고 무려 100만자 넘는 동북항일련군 사적을 발굴 정리, 사진 5000여장을 수집한 공산당원이 있다.

  그가 바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75세, 조선족)이다. 흑룡강 목단강 출신인 김춘섭 주임은 퇴직하기전 왕청현 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직을 맡았었다.

  2015년 7월 8일,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 길림성인민정부, 길림성군구는 김춘섭 동지에게 ‘항일전쟁정신을 고양하는 모범’이라는 영예칭호를 수여했고 2019년 9월 25일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로 선정되였다.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맞으며 전국 ‘두가지 우수, 한가지 선진’ 표창대회에서 ‘전국 우수공산당원’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김춘섭 주임은 “이번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 경축대회에 참가하게 되여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또 전국 400명 우수공산당원의 행렬에 오르게 되여 너무 감개무량합니다. 앞으로 초심을 잊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면서 후대양성사업에 정열을 몰부어 만년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고 싶습니다”라고 이번 성회에 다녀온 소감을 밝혔다.

  왕청현은 항일전쟁시기 연변지역의 주요 전장이였다. 항일전쟁 기간에 100여차례의 항일전투가 발생했고 603명의 항일련군렬사가 희생되였다. 김춘섭은 2005년에 정년퇴직한 후 왕청현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았는데 사업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지난 시기 력사에 대해 료해가 너무 적고 깊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그가 하향했을 당시 수십개의 돌로 둘러쌓인 작은 둔덕에 자리한 한 렬사의 무덤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김춘섭은 이때부터 왕청에서 희생된 항일 영웅들의 묘비를 세우자는 ‘군령장’을 자신에게 내렸다.

  2010년 8월 김춘섭은 30여만원의 투자를 이끌어내 동장영(童长荣) 렬사릉원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또 시대 발전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2012년 초에 전국 최초로 되는 현급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홍색사이트 ‘왕청영웅렬사사이트’를 기획하고 개통했으며 스스로 보수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배웠고 이미 수만명의 네티즌을 확보하고 있다.

  48년의 당력을 가진 로당원 김춘섭 동지는 항일전쟁정신을 고양하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한 걸출한 본보기이며 청소년의 성장을 관심하고 혁명유전자를 전승한 우수한 대표이며 공산당원의 본색을 지키고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실천한 생동한 본보기이다.

  현재 왕청은 ‘왕청-동만특별위원회 밀영(汪清至东满特委密营)’ 등 4개의 홍색관광 루트를 형성했고 동장영 렬사릉원, 부흥지역 중국침략일본군 죄증관(复兴地区侵华日军罪证馆), 왕청 100년 혁명력사기념관 등 ‘1원 5 관 1 거주지 1유적지(一园五馆一居一迹地)’는 이곳의 소중한 애국주의 교육 자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현지인들은 항상 먼저 김춘섭 동지를 떠올리고 퇴역해도 퇴색하지 않고 퇴직해도 일을 멈추지 않는 이 로당원에게 한결같은 찬사를 보낸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에는 ‘팔도’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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