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7-30 14:40:24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7월 29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7월의 다섯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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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네, 북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7월 중순이면 벼가 여뭅니다.

벼는 올벼와 중올벼, 늦벼로 나뉘는데요, 올벼는 7월 중순에 여물고 중올벼는 9월 중순에 여물며 늦벼는 10월 중순에야 여뭅니다.

남방에서 올벼는 7월 중순에 여뭅니다. 7월 중순인 7월 13일은 묘족의 ‘신화(新禾)축제’입니다. 이 축제의 이름에 나오는 벼 화는 벼가 여물어 고개를 숙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모든 곡식을 총칭하는 뜻으로 쓰입니다.

남방 유주의 융수 묘족자치현 청수강과 도류강 중상류에서 살고 있는 묘족들은 7월 13일이면 화려한 의상 차림으로 여러 가지 즐거운 활동을 벌이고 명절을 경축합니다. 신화축제는 얻기 쉽지 않은 벼 씨앗을 기리어 만든 묘족의 명절입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먼 옛날 인간 세상에는 벼가 없었습니다. 벼는 뇌공(雷公)이 살고 있는 하늘 세계의 곡자국(谷子國)에만 있었다고 합니다. 세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만 심산유림에서 짐승을 포획하고 야생 과일을 따며 야채를 캐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벼 씨앗을 얻기 위해 남천문 아래에 살고 있던 묘족의 선조가 방법을 궁리해냈습니다. 세간에는 귀중한 짐승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9천9백9십 9종의 희귀한 짐승을 잡아서 곡자국에 올라 아홉 말, 아홉 되, 아홉 사발의 벼 씨앗을 바꿔왔습니다. 그들은 이 씨앗을 창고에 넣었다가 봄을 기다려 파종했습니다.

많은 곡절 끝에 땅에서는 드디어 벼가 자랐고, 사람들은 끝끝내 이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7월 13일 전후이면 벼가 여뭅니다. 볍씨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묘족은 이날을 ‘신화축제’로 결정했습니다.

7월에는 또 근대 조선반도 역사에 잊지 못할 날이 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조선정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정식으로 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약 3년에 걸친 조선전쟁이 종식을 선고했습니다. 조선은 이날을 ‘조선 조국전쟁 승리의 날’로 결정했습니다.

7월 27일은 양력으로 올해의 208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가지 인제 157일 남았습니다.

[간주]

이번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재미있는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과 훈춘 경계의 마을 ‘고려마을’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까울령의 저쪽에 고려마을이 있었다

  예전에 도문에서 훈춘으로 가려면 꼭 그 산마루를 넘어야 했다. 일명 까울령, 그 무슨 까마귀가 날아가다가 울음을 떨어뜨린 이름 같기도 한다. 그렇다면 산이 하도 가파르고 높아서 새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넘었을까…

  까울령은 두만강 기슭까지 머리를 쭉 내밀고 장벽처럼 앞뒤를 가로막고 있다.

  “겨울이 되면 어떤 차들은 산길을 버리고 얼음 위로 달렸지요.”조만길 씨의 어린 기억에는 바퀴 달린 ‘썰매’가 그 무슨 동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때 두만강의 빙판에는 네발 달린 소가 가서 얼음구멍에 빠진 네 바퀴 차량을 끌어내는 진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한다. 조만길 씨가 살던 경영촌慶榮村에서 집집마다 식탁에 늘 반찬처럼 올리던 한담거리였다.

  아이러니하게 조만길 씨는 훗날 그 얼음구멍을 만들던 강물의 관리자로 된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향하여 진鎭 수력관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경영촌은 까울령 동쪽의 첫 동네이다. 광서光緖 15년(1889), 이곳은 나루터가 생기면서 배 선船, 나들목 구口를 넣어 선구船口라고 불렸다고 한다. 1924년, 동네는 20여 가구로 늘어났으며 동쪽의 지상 표지물 같은 굴륭산窟窿山의 이름을 빌어 공동산孔洞山이라고 새롭게 불렸다. 굴륭산은 북쪽 산비탈에 작은 동굴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1949년 마을은 상서로운 뜻을 부여하여 번영을 경하한다는 의미의 경영慶榮이라고 개명하였다.

  1980년대 초 경영촌에는 약 200가구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꾸역꾸역 밀려온 타지방 사람들이 두만강의 물처럼 마을을 야금야금 잠식하며 지금은 타향 사람들이 이 마을을 거의 반 정도 삼키고 있다.

  어쨌거나 조만길 씨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경영촌의 사람들은 선조가 거의 다 한 고향이었다.

  “저기 강 건너 쪽입니다. 저처럼 모두 함경북도에 원적을 두고 있었지요.”

  조만길 씨의 말을 따른다면 예전의 마을에는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산마루를 불렀던 이름인 ‘까울령’은 분명히 그들의 고향인 함경도의 방언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이 ‘까울령’은 훈춘琿春의 지명지地名志에서 그 원형을 드러낼 듯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까울령은 옛날 고이산高爾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이산은 만족 말로 홰나무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고이산을 조선말로 음역하면 ‘까울령’이 된다. 1964년 고이산을 다시 경영촌 남쪽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남고령南高嶺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까울령의 수목은 재생림이며 홰나무가 주종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서 홰나무의 산이라는 의미의 고이산이라고 이름을 달았는지는 영문을 알 수 없다. 더구나 그 후의 이름인 남고령은 경영촌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한다.

  기실 까울령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은 흥진촌興進村이다. 창문을 열면 아스라이 솟아있는 산이 금방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흥진촌은 흥성하고 전진한다는 의미로 1984년에 지은 이름이다. 선통宣統 2년(1910)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봄이면 산과 들에 살구나무 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행화촌杏花村이라고 불렸으며 훗날 마을에 조선인만 살고 있다고 해서 고려촌이라고 불렸다. 한때는 서쪽의 수남촌水南村 소속으로 있었다. 수남촌은 동쪽의 봉오골鳳梧溝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봉오골은 일명 봉오동이라고 하는데, 선통(宣統, 1908~1912) 연간에 개발된 무려 25리의 긴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에는 하, 중, 상 등의 마을이 30~60가구씩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까울령’의 험준한 산줄기는 이 봉오골을 병풍처럼 빙 둘러치고 있다.

  흥진촌 아니 고려촌은 그 병풍 바깥쪽에 기대어 있었다. 고려촌의 북쪽 고개를 넘으면 금방 봉오골이 나선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봉오골을 북봉오골이라고 불렀고 고려촌을 남봉오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봉오골이라고 하면 대뜸 우리 마을인지를 알았지요.” 고려촌 태생인 한룡범 씨의 말이다. 예전에 항간에서 남봉오골이라는 이 이름은 고려촌이나 흥진촌보다 더 잘 통했다고 한다.

  한룡범 씨는 고려촌에 몇몇 남지 않은 토박이였다. 그의 증조부가 함경도 은덕군에서 자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조손 4대가 거의 100년 동안 한 고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은 인가가 한때 50여 가구에 이른 적 있지만 현재는 30가구 정도이며 그나마 사람이 들어있지 않는 가옥이 적지 않다. 한룡범 씨의 말을 빈다면 두메산골이라서 사람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고려촌은 이전에는 조와 콩 농사를 지었으며 지금은 옥수수와 콩을 위주로 심고 있었다. 하도 척박한 고장이라 토지개혁을 하던 1947년 무렵 마을의 으뜸가는 부자는 지주 아닌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이 부농도 여느 농부들처럼 짚 이영을 이고 살았다고 한다.

  “북봉오골은 정말 ‘만석부자’의 고향이지요.” 한룡범 씨는 고개 하나를 사이 둔 봉오골에 여간 부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봉오골은 금처럼 귀한 송이버섯은 물론이요, 영지와 황기, 기름개구리 등 특산물이 산판에 널려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봉새가 깃든 오동나무의 골짜기라는 것.

  전하는 바에 의하면 봉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오동나무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동나무가 나는 터는 천하의 길지라고 한다. 그러나 봉오골이 세간에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오동나무 때문이 아니다.

  1920년 6월 봉오골에서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 추격대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완전히 참패했다. 한편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유명한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투가 된다.

  이때 일본군은 함경도 풍서리에서 봉오골에 지원부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풍서리는 한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이며 바로 경영촌의 강 맞은쪽에 위치한다.

  일본군 지원부대는 두만강을 건너고 경영촌을 지나 봉오골로 향발했다. 이 무렵 경영촌은 또 ‘용배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배미’는 함경도 사람들이 뱀을 이르던 말이니 ‘용배미’는 용과 같은 뱀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원체 마을 동쪽의 굴륭산에는 뱀이 유난히 많았고 또 용과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으니 그럴 법 한다.

  각설하고, 이날 저녁 까울령 동쪽에 있는 비파골琵琶溝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후문이지만 일본군 지원부대가 봉오동에서 철수하는 부대와 저들끼리 혼전을 벌렸던 것이다. 비파골은 골짜기가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현지인들은 중국말 발음을 따서 피폐골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인가가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벌에 내려와 살고 있다. 진짜 피폐한 골짜기로 된 것이다.

  봉오동전투의 일부인 비파골의 전투 역시 ‘피폐’한 역사로 사라질 뻔 한다. 다행이 20여 년 전, 연변의 사학자들이 경영촌에 가서 현지 70, 80세 노인들의 목격담을 채집하여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주전장인 봉오골은 끝내 세월의 깊은 물에 종적을 감춘다. 봉오골을 흐르는 시냇물은 바로 봉새가 골라서 마신다는 전설의 단물이라고 한다. 이 시냇물이 나중에 도문 사람들의 수원지로 되었던 것이다. 1977년 골짜기에 저수지를 세우면서 봉오골의 사람들은 골짜기를 떠나 도문의 여러 지역에 흩어진다.

  인제 저수지의 물위에는 구름과 산과 나무가 비껴있을 뿐이며 옛날 골짜기를 메웠던 총과 칼의 그림자를 볼 수 없다. 산비탈에 고독히 서있는 봉오동전투 기념비가 흐릿한 옛 기억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다.

  봉오골은 더는 인가가 여기저기 널려 있던 동네 봉오동이 아니다. 오동나무는 물에 잠기고 봉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사실 오동나무에 깃드는 새는 봉새이지만 오동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하는 새는 까마귀라고 한다. 까마귀는 산마루에 울음소리만 아니라 오동나무에서 물어온 씨앗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까울령은 애초부터 봉오골과 뭔가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 같기도 한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러했다. 봉오골 역시 고려촌처럼 시초부터 조선인들이 살고 있던 고려마을이며, 이 때문에 예전에는 봉오골과 고려촌의 남쪽에 위치한 높은 산을 남고려령南高麗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문이 아니라 도문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이다. 나중에 줄인 말로 남고령南高嶺 혹은 고령高嶺이라고 불렸다는 것. 이에 따라 까울령은 ‘고령’이 중국말 지명으로 고착된 후 다시 조선말로 음역된 이름이라는 해명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산 하나를 두고 지방문헌마저 이렇듯 이름의 뜻을 제각기 해석하여 혼선을 주고 있다. 더구나 산은 또 두 지역의 경계선으로 되고 있어서 이름 못할 뭔가의 뉘앙스를 피어올리고 있는 듯하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에는 ‘팔도’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팔도’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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