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소개
게시판
조선어부 소개
 
cri korean.cri.cn/
두보초당: "시성"의 옛집
2016-08-10 09:35:09 cri

(사진설명: 아름다운 두보초당)

개관:

두보초당(杜甫草堂)은 고대 중국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당(唐)의 시인 두보가 성도(成都)에 유배했을 때 머물던 곳이다. 따라서 두보초당은 중국에서 두보의 생애와 연관된 자료가 가장 많고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오늘날 초당은 두보의 평생을 가까이에서 보는 좋은 장소인 동시에 야외 다실도 마련되어 차를 음미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비내리는 날 두보초당에서 차 한잔 하는 운치는 직접 느껴보아야 한다.

(사진설명: 아늑한 두보초당)

역사:

서기 759년 두보는 안사의 란(安史之亂)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오늘날의 감숙(甘肅) 남부의 거주지를 떠나 남하해 사천 성도에 이르렀다. 이듬해 지인의 도움으로 두보는 성도 서쪽 교외의 완화계(浣花溪) 강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성도초당이라 이름했다.

765년 유일한 믿음이던 지인이 별세하자 두보는 하는수 없이 가족을 데리고 성도를 떠났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후 성도초당이 무너졌는데 오대(五代)의 시인이 초당의 터에 초갓집을 짓고 두보초당이라 개명했다.

(사진설명: 두보의 동상)

그로부터 송(宋)과 원(元), 명(明), 청(淸) 등 조대를 거치며 초당은 수차 재축되었고 그 중 최대 규모의 증축공사는 명나라때인 1500년과 청나라때인 1811년에 있었다.

두 번에 걸친 증축공사에서 두보초당의 규모와 구도가 기본 형성되어 시인의 옛집과 기념사당을 한 몸에 모은 박물관형식으로 탈바꿈,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고건물과 수려하면서도 고요한 정원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의 명소로 부상해 오늘날에 이른다.

1961년, 두보초당은 중국 중점문화재 보호업체로 선정되고 1985년, 두보초당박물관을 설립, 2006년 중국 4A급 명소로 선정, 2008년 중국 국가 1급 박물관으로 되었다.

(사진설명: 두보초당의 일각)

주요명소:

두보는 이 초당에서 4년을 머물며 240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두보의 명시들인 <봄밤에 내리는 비>, <가을바람에 노래하는 오두막> 등이 모두 이 곳에서 창작되었다.

위대한 이 시인을 기리기 위해 북송(北宋)때부터 사람들이 두보가 머물었던 곳에 사당을 세웠다. 물론 오늘날의 초당은 과거 두보가 머물던 초당이 아니라 두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사진설명: 시사당의 일각)

부지 20헥타르의 두보초당은 본전과 시사당(詩史堂), 문, 공부사(工部祠), 소릉초당(少陵草堂) 비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전과 시사당, 공부사 세 채의 주요 기념건물이 중심선상에 위치해 장엄함을 자아낸다.

성도 두보초당 정문의 "초당"간판은 청나라 강희(康熙)제의 17번째 아들이 쓴 것이다. 두보를 기념하는 사당인 시사당의 중앙에는 두보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역대 명인들이 쓴 글과 편액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보가 이 곳에서 1400여수의 시를 창작하고 이런 시를 통해 당나라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당나라가 흥성으로부터 멸망에로 나간 역사를 기록했다고 해서 본전의 이름을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로 시사당이라 한다.

(사진설명: 공부사의 일각)

두보가 절도참모검교공부원공랑(節度參謨檢校工部員工郞)을 지냈다고 해서 사당 이름이 공부사이다. 높은 단위에 건듯 올라 앉은 건물은 장엄하고 숙연하게 보인다.

사당내에는 명나라와 청나라때에 축조한 석각으로 된 두보상이 세워져 있고 그 중 1602년에 축조한 두보의 반신상은 초당 유적에서 가장 유구한 두보의 석상이다.

사당에는 청나라 건륭(乾隆)년간과 가경(嘉慶)년간의 석각물인 "소릉초당도 (少陵草堂圖)'가 정교함의 극치를 자아낸다. 바로 이 그림에 의해 초당의 어젯날 모습을 복원했다.

(사진설명: 소릉초당 비석의 정자)

공부사의 동쪽에는 두보초당의 심벌로 인정되는 소릉비정(少陵碑亭)이 있다. 두보는 이 곳에 머무는 기간 창작한 시에서 스스로를 "두릉야로(杜陵野老)', "소릉야객(少陵野客)"이라 자처하면서 사람들은 그를 "두소릉"이라 했고 따라서 사람들은 이 곳을 소릉초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짚을 떠인 지붕을 한 정자에 소릉초당(少陵草堂)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강희제의 17번째 아들 과친왕(果親王)이 쓴 것이다. 1734년 과친왕은 달라이를 티베트로 배웅하면서 성도에 들렀다가 두보초당을 배알하고 이 글을 남겼다.

사당의 동쪽에는 꽃길이 있고 서쪽은 물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앞뒤에 정자와 누각, 연못, 방갈로 등이 어울려 다양하다. 이 꽃길은 바로 두보의 시에 나온 화경(花徑)을 본따서 조성했다.

(사진설명: 두보초당의 꽃길)

두보는 시에서 "어느 손님이 꽃길을 쓸지 않아도 때가 되면 꽃길은 그대를 위해 문을 여네"라고 썼다. 오늘날의 꽃길 화경은 두보초당와 초당사(草堂寺)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양쪽에 붉은 담장이 둘러선 좁은 꽃길의 끝에는 초당영벽(影壁)이 조성되고 청나라 후반에 벽에 청자를 박은 조성한 "초당"이라는 두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

두보초당의 정원에는 또 향기넘치는 매화나무와 난이 있고 무성한 대나무와 소나무도 있어서 조화와 운치를 자랑한다. 매화나무가 숲을 이루는 매원(梅園)에는 구불구불한 석교위에 4층 석탑이 솟아 옛스러움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두보초당의 월동문)

"일람정(一覽亭)"이라는 석탑의 이름은 두보의 시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니 뭇 산이 발 아래 보인다"는 의미의 "일람중산소(一覽衆山小)"에서 왔다. 연못에 비낀 탑이 꼬불꼬불한 석교와 어울려 운치를 자랑한다.

둥근 월동문(月洞門), 탑, 다리, 호수, 꽃, 나무가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 이 곳은 관객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명소이다. 그밖에 2002년에 개관한 초당사도 볼만하다.

초당사의 대웅전은 대아당(大雅堂)이라 이름하는데 내부에 대 면적의 채색의 벽화가 있고 고대 중국의 유명 시인 12명의 조각상이 두보의 생애와 고대 중국의 시가역사를 형상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설명: 사진설명: 두보초당의 일각)

키워드:

역사인물, 고건물

위치와 교통:

두보초당은 사천(四川)성 성도(成都, Chengdu)시 서문(西門)밖 완화계(浣花溪) 기슭에 위치, 성도에서 208선, 35선, 82선, 59선, 170선, 58선, 165선 버스를 이용한다.

(사진설명: 두보초당의 야경)

계절:

일년 사계절

설명:

712년에 출생해 770년에 타계한 두보는 호가 소릉야로(少陵野老),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소릉(杜少陵)이라 부른다. 당나라가 번성에서 몰락으로 이르는 과정에 산 두보는 당나라의 역사를 시에 담았다.

현실주의 시인인 두보는 침울함을 주선으로 사상과 예술의 높은 기법을 보여주어 후세 사람들로부터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두보의 시는 1400여수에 달한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두보)

  관련기사
중국각지우편번호중국각지전화코드편의전화번호호텔
China Radio International.CRI. All Rights Reserved.
16A Shijingshan Road, Beijing,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