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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타임]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곽말약옛집
2016-01-28 14:43:53 cri

"천재란 무엇인가? 소위의 천재는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이다."

이른바 천재에 대해 곽말약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래서일가요? 일생을 끊임없는 연구와 부지런한 창작으로 보낸 곽말약에게는 훗날 다양한 신분이 얹어집니다. 유명한 문학가, 극작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사회활동가 등등. 이맘쯤이면 잘 알려진 그의 저서와 성과는 물론 그가 창작생활을 해온 환경도 궁금해지는데요, 오늘 "명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에서는 베이징시 서정구(西城區) 전해서가(前海西街) 18호에 자리잡은 곽말약의 옛집을 찾아 떠나볼가 합니다.

곽말약옛집은 십찰해(什刹海), 후해(后海), 골목관광의 시작점입니다. 곽말약옛집 문밖거리 양측에는 북경 본토발음으로 관광객을 끌고 있는 인력거꾼들로 항상 들썩입니다. 가림벽의 동쪽으로 그냥 무심코 걷다보면 자칫 놓칠 수 있는 자그마한 중문이 보이는데 중문의 간판에는 "곽말약옛집"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습니다. 이 몇자는 주은래 총리의 부인 등영초(鄧穎超)여사가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돌로 쌓인 문병(门屏)과 작은 흙언덕이 보입니다. 정원에 들어서면 풀밭에 세운 곽말약 동상이 있는데 이 동상은 중앙미술학원의 사도조광(司徒兆光)교수가 창작한 것입니다. 태연한 기색을 하고 있는 곽말약 동상은 마치 평온한 휴식을 취하는 듯, 또 뭔가 사색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곽말약기념관의 곽평영(郭平英)관장은 곽말약이 생전에 이 정원에서 앉아 늘 휴식을 취한곤 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이 동상을 조각하려고 사도조광 교수는 3년동안 창작해왔습니다. 후에 관계자들의 동의를 거쳐 이 조각상을 입구가 아닌 정원 은행나무 아래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은행나무의 후광으로 이 동상에 시적인 의미가 부여된 듯했습니다.

정원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은행나무입니다. 가을이 되면 금색으로 물들인 나뭇잎들이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한 빛을 발합니다. 곽말약은 이 은행나무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은행나무는 줄기가 곧고 쉽게 의지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성이 있으며 경박하게 드러내놓는 아름다움보다 고상한 아름다움이 묻어있다고 늘 얘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곽말약이 특별히 아끼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바로 정원 왼쪽으로 구불면 보입니다. 이 나무는 곽말약이 손수 재배하고 "어머니 나무"라고 이름도 지어주었습니다. 이 나무를 왜 "어머니나무"라고 했을가요? 여기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954년 봄 곽말약의 부인인 우립군(於立群)이 중병으로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베이징을 떠난지 이틀째 되던 날 곽말약은 아이들을 데리고 서교 대각사(大覺寺)로 가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은행묘목을 가져와 정원에 심었습니다. 곽말약은 어머니가 부재하는 동안에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각인시켜주려고 "어머니나무"라고 이름짓고 부인이 하루빨리 병마를 이겨내고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정원을 지나 구식 저택의 중문에 들어서면 사합원인데 동서상방(廂房)과 두 줄의 정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방들은 복도로 모두 다 연결되었습니다. 북으로 향한 정방 5채는 곽말약의 작업실과 접대실, 거실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이 세방은 그저 창문 넘어 구경할 수 있는데요. 방안의 진열은 곽먈약 생전 생활했던 모습과 일치합니다. 객실의 소파는 영어문자 U자형으로 배열되었고 곽말약은 평소 피아노앞에 놓인 단일 소파에 늘 앉아있었습니다. 곽말약은 거의 청력을 잃어 왼쪽귀에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그나마 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를 찾아온 손님들은 늘 그의 왼쪽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군 했습니다. 창가에 놓인 시계는 곽말약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오후 4시 20분에서 멈췄습니다.

곽말약의 작업실은 응접실과 동서로 이어졌는데요. 작업실의 책상에는 그가 떠난 날자를 가리키는 달력이 펼쳐져 있고 그가 착용하던 보청기며 애용하던 차잔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3채의 동서 상방에는 곽말약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시인, 학자인 곽말약의 문학, 역사, 고고학, 번역 등 영역의 휘황한 업적을 알 수 있고 곽말약이 친필로 쓴 수고, 도서 등 소중한 문물자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서상방에 가면 페인트하지 않은 일식목갑이 보이는데요. 겉면에 해서체로 된 "창해유률(滄海遺粟)" 네자가 적혀있습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목갑 같지만 70여년전에는 이 목갑이 전반 중국학계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이 목갑에는 9가지 갑골금문 저술수고가 들어있는데 이는 곽말약이 일본에 있으면서 학술연구에 몰두해온 정화입니다.

곽말약은 중국 역사를 연구하면서 전해져 내려온 문헌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최초의 자료를 찾으려 나섰습니다. 후세인들의 가공을 거치지 않고 고대에서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자료들말입니다. 이렇게 곽말약과 갑골문, 금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1929년 곽말약이 집필한 "갑골문자연구"는 고대사회 진실탐구를 위해 진행한 고대문자연구의 최초저서였습니다.

상방을 지나 남으로 향한 가운데 정방은 곽말약 부부가 평소 서예를 연습하던 곳이였습니다.

곽말약옛집은 부지면적이 7000평방미터, 건축면적이 500평방미터로 전신은 청나라 화신(和珅) 왕부의 정원이었습니다. 동치(同治)년간에는 공친왕 혁흔의 여물장이었고 중국이 해방된 후 주중 몽골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곽말약은 1963년 11월에 입주해 생의 마지막 15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고색찬연한 사합원에는 일대 문학거장의 서책 향이 묻어나는 듯 했습니다.

1982년 곽말약옛집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8년부터 대외로 개방했습니다.

일명 곽말약기념관으로도 불리우는 곽말약옛집은 화요일부터 일요일 사이에 오전 9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참관가능합니다.

일대 거장 곽말약의 업적과 그 업적뒤에 숨겨진 이야기 궁금하다면 그가 살던 옛집을 찾아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껴보는 건 어떨가요?

소위 천재에 대한 곽말약의 정의를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곽말약옛집편"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천재란 이 단어자체는 의미가 애매모호하다. 천재란 절대 '태어나서부터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다. 천재는 대부분 세심한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

번역/편집: 권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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