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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타임]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완령옥옛집
2016-03-02 10:50:04 cri

"유언비어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이는 1930년대를 풍미했던 중국 유명 무성영화 배우 완령옥(阮玲玉)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민국시기 4대미녀로 불리웠던 명품배우 완령옥의 대표작으로는 "야초한화(野草閑花)", "신녀(神女)"(1934)를 꼽을 수 있습니다.

짧은 25년생에 29편의 영화 주연을 꿰차고 열연을 펼친 완령옥 오늘날 중국영화백년사책(中國電影百年史冊)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혼신의 연기로 영화계의 호평을 받았지만 무수한 유언비어에 시달려 고통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배우 완령옥, 그의 옛 거처를 찾아 삶의 흔적을 더듬어봅니다.

상해 정안구(靜安區) 신갑로(新閘路) 1124골목길에 들어서면 옛 광고지면처럼 담황색의 추억에 사로잡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줍니다. 담담한 백란화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한적한 심원(沁園)에는 3층으로 된 서양식 건물들이 세월의 세례를 받고도 여전히 우아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걷다가 걷다가 문패에 9호라고 적힌 석고문 (石庫問) 형식의 3층 건물앞에 멈추면 이름모를 슬픔과 울적한 기분이 차오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건물이 바로 완령옥이 최후 2년을 보낸, 수많은 슬픔과 고통스러운 기억이 들어있는 그의 옛거처입니다.

이 건물은 그때 차잎상인인 당계산(唐季珊)이 선물로 완령옥에 준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건물 1층은 완령옥이 친구나 손님을 접대하는 접대실이었고 2층은 완령옥이 일상 생활과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던 침실입니다. 이곳은 여전이 70년전의 장식풍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약 25평방미터되는 이 방의 옆에 10여평(?평방미터)의 화장실이 딸려있는데 화장실의 버킷이랑 수도꼭지는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완령옥이 사용했던 유품들입니다. 3층은 완령옥의 어머니와 하인들이 살았었습니다. 검붉은 색의 벽과 여러 색채가 뒤섞여 얼룩덜룩한 창문, 붉은 기와로 장식한 벽 모퉁이… 지난날 상해의 풍모는 여전한데 여배우의 고운 자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서양식 3층건물에는 완령옥의 기쁨과 슬픔, 꿈과 생활이 물들여 있고 건물의 기와 한장, 나무 한그루마다 그의 사랑과 열정, 원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완령옥옛집은 스폐인식의 서양식 건물로 그때 상해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주택 중 하나였습니다. 비탈진 층면에 기와를 쌓아올리고 1층 응접실 밖에는 작은 화원으로 통하는 쇠창문이 있는데 이는 1934년 완령옥이 "양우(良友)" 잡지의 초청으로 표지촬영을 하던 배경장소이기도 합니다. 고급진 주택과 달리 그는 이곳에서 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연기가 인생의 전부일 정도로 그는 작품마다에 심혈을 기울였고 상해 무성영화시기 가장 유명하고 연기로 인정받은 가장 훌륭한 여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무성영화 시대에 대사나 음향이 없이 오로지 몸짓과 표정만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배우로서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는 29여편의 영화에서 농촌 아낙부터 빈농의 딸, 여승 무녀, 작가까지 폭넓은 연기를 펼치면서 내면적인 연기로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주어진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그는 늘 자신을 방에 가두고 캐릭터의 심리, 말투, 행동, 몸짓을 연구했습니다. 방에 들어가 때론 웃고 때론 우는 그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주변사람들에게 "그래 나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라고 해석했답니다. 한 인물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 인물에 맞는 느낌을 살리고저 그는 천여편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노력은 성공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죠. 연기하면서 그는 인물의 정감, 느낌을 정확히 살렸고 적절한 눈빛, 표정, 몸짓으로 정확히 표현해냈습니다. 기타 배우들의 과장되고 표면적인 연기와 달리 완령옥은 내적감응력과 형체적 표현의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결합으로 그의 탁월한 재능과 비범한 내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업으로 승승장구했지만 그의 감정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소중한 자기(瓷器)처럼 간직해줄 안락처를 찾던 그의 바람은 한낱 흘러가는 뜬구름과 같을 뿐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완령옥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 장달민(張達民)과 가까웠지만 장달민 부모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그때 중국의 불안한 상황으로 인해 완령옥이 홍콩에 잠시 머물 때 차상인 당계산이 그를 위로해주면서 그의 삶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당계산이 선물한 상해 옛집에 머물면서 "신녀 (1934)"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는 평단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완령옥과 당계산은 고소를 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장달민이 두 사람을 시기하여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언론의 계속된 공격과 무수한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시기에 완령옥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백함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장례식 날 노신은 "유언비어의 위험성을 논함(論人言可畏)"이라는 추도문을 펴냈습니다. 이날 그의 지인 300여명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흡사 거대한 장룡과도 같은 송장대오와 30여만명의 추모인들이 거리를 채웠습니다. 당시 상해 주재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는 이런 광경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장례"라고 대서특필로 보도했습니다. 훗날 관경붕(關錦鵬) 감독은 완령옥의 일생을 다룬 영화 "완령옥"을 촬영제작했고 유명배우 장만옥(張曼玉)이 주연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명인과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진채 평범한 시민들의 거주지로 탈바꿈했고 시민들은 이 곳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중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이 아름다운 여배우는 사람들의 기억저편으로 사라졌고 그저 그 시기를 회상하는 사람들만이 피다 진 꽃처럼, 떨어진 구슬처럼 그녀의 삶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완령옥, 그녀의 삶의 흔적이 들어있는 심원 9호의 3층건물, 이곳에서 그녀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이 한몸 사라진다 한들 아쉬울데 있겠냐만은 그저 유언비어들이 무서울 따름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도 갚고 말 한마디가 비수로 되어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죠. 완령옥 그녀의 안타까운 삶의 그늘이 드리워진 옛집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또 한번 고민해야 되지 않을가요?

오늘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완령옥옛집편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회에는 매란방옛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역/편집: 권향화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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