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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타임]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제백석옛집
2016-03-02 10:52:16 cri

오늘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에서는 매란방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중국회화대가, 세계문화명인 제백석의 옛집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백석(齊白石)은 중국 근대 미술문화사상 유명한 화가이고 서예가이며 전각가입니다. 그는 베이징 국립예술전문학교의 교수, 중앙미술대학 명예교수, 베이징화원 명예원장, 중국미술협회주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예술창작에 몸담아 온 제백석은 3만여폭의 그림과 3천여편의 시, 유수의 자필원고를 남겼습니다. 특히 산수화, 초상화에 능한 제백석의 대표작으로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으며, 저서로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습니다.

제백석의 "자술(自述)"에는 "1927년에 과차골목(跨車胡同)15번지 즉 지금의 13번지에 있는 집을 구매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백석은 바로 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 과차골목 13번지에 위치한 이 옛집에서 생의 최후 30년을 보냈습니다.

베이징 서단(西單)상업구 벽재골목(辟才胡同)에 이르면 고층빌딩의 수림속에 묻힌 자그마한 사합원이 보입니다. 청회색 벽돌담으로 둘러쌓인 이 사합원이 바로 제백석옛집입니다. 동서향의 이 사합원은 번잡한 현대도시의 분위기에 고풍적인 묘미를 가해줍니다.

지금의 제백석옛집은 기존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제백석 후손들이 기억하는 이 옛집은 시적정취가 다분하고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정교한 정원이었습니다. 사합원은 3채 북방(北房)이 주체를 이루었는데 가운데 방은 객실 겸 식사 공간이고 동쪽 방은 거실, 서쪽 방은 화실(画室)이었습니다. 전반 사합원의 구조는 간단하고 내부도 소박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화실의 서쪽켠에 놓인 회화용 책상 남단에는 넓이가 각기 다른 선지(宣紙)들이 쌓여있고 북단에는 문방사우와 염료를 담았던 크고작은 그릇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등받이가 있는 원형의자 우에는 방석이 놓여있었는데 이는 제백석이 서예 혹은 회화 창작할 때 앉았던 의자입니다. 회화용 책상 맞은켠에는 높다란 책상이 있고 그 우에는 유리케이스가 달린 시계가 놓여있습니다.

백석화실의 거실에는 원형과 네모의 두가지 형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상이 있고 긴 등받이 의자가 북쪽 벽에 놓여져 있습니다. 추운 날에 제백석은 의자에 이불을 깔고 식후 잠간 여기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제백석의 생활은 화려함과 거리가 먼 소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응접실에는 소파도 없이 그저 걸상만 몇 개 놓았을 뿐입니다. 제백석 후손들의 소개에 의하면 제백석은 안전을 고려해 1935년 북쪽 방앞의 복도를 철사슬로 묶어 난간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림에 글씨나 시문을 쓸 때 "철옥(鐵屋)"이라는 글자를 적어 이곳에 대한 깊은 정을 표현했습니다. 1953년 제백석은 이 철옥을 "백석화옥(白石畫屋)"으로 수정하고 전서체로 쓴 편액을 만들어 걸었습니다.

제백석이 살던 이 정원에는 포도와 능소화(淩霄), 버드나무들이 자라나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졌습니다. 정원의 북쪽켠에는 지붕을 능가하는 높다란 대추나무가 있었고 북쪽과 남쪽 정원을 이어주는 원형문은 무늬를 새긴 벽돌로 지어 고풍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제백석은 이 사합원에서 담담한 일상을 보내면서 2만여점의 작품 창작했습니다. 그가 간결하고 힘찬 붓을 휘둘러 그린 화초며 벌레, 새우, 산수, 인물은 정교함속에서도 독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제백석은 이런 화풍으로 현대중국화를 위해 소박하면서도 참신한 예술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필묵으로 중국화의 현대적인 예술정신을 표현했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삶의 지혜와 철학을 전했습니다. 제백석의 산수화는 예술창신에 대한 자부심과 통찰을 통한 깨달음을 표현했고 인물화는 표정에 담긴 내면의 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백서의 서예 또한 간결하면서도 대범하고 지어 웅건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특무 우두머리였던 북평 위경사령(偽警司令) 선철오(宣鐵吾)는 일찍 제백석의 명성을 듣고 생일잔치날 그를 초대했습니다. 연회장에 도착한 제백석은 주변을 살펴보고 잠간 사색에 잠기더니 종이를 펴고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잠간 사이에 종이에는 게가 그려졌습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숨쉬는듯 생동한 이 회화작품에 감탄해마지 않았고 선철오도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습니다. 이때 제백석은 붓끝을 놀려 그림옆에 몇자를 적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옆으로 가는 게의 특성을 비유해 "네가 언제까지 횡행(橫行)할지 두고보자"였습니다. 그러고는 소매를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돌아갔습니다. 이는 매국노에 대한 제백석의 풍자와 분노가 절실히 보여지는 대목이었습니다. 1937년 일본침략군이 북평을 점령한 뒤 제백석은 문을 닫고 일체 내방객을 사절했습니다. 그것은 위만주군의 두목들이 그림을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문에 "종래로 벼슬은 민가에 오지 않는 법이니 일체 접대를 사절한다"고 공지하고 옆에 비취새를 그린 그림도 덧붙였습니다. 그때 이 그림은 참으로 독특했는데요, 보통 비취새를 그리면 돌이나 강가에 서있는 비취새와 수면우로 올라오는 물고기를 함께 그리는데 제백색은 물고기를 그리지 않고 깊은 물속에 있는 새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옆에 "비취새의 그림에는 물고기가 반드시 등장하지만 특별히 새우를 그렸네, 새우가 뜨지 않으니 비취새인들 어찌하랴?"라는 내용의 문구를 적었습니다. 즉 제백석은 자신을 새우에 비유하고 한간들과 일본 침략자들을 비취새에 비유해 이자들이 호시탐탐 그림을 노린다해도 절대 그려줄 의향이 없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숭고한 민족절개를 지닌 중국 근대 현대 미술사에서의 걸출한 화가, 서예가, 전각가 제백석은 이곳에서 20세기 중국 회화예술의 휘황한 업적을 쌓았고 후손들에게 소중한 예술자원을 남겨주었습니다.

오늘날 제백석옛집은 기존의 우아한 정취를 잃은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1984년 5월 베이징시 정부는 이곳을 베이징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지금은 제백석 후손들의 저택으로 개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 거장의 옛 거처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과차골목 13번지에 있는 사합원은 오늘도 제백석의 못다한 이야기를 담은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제백석옛집 편이었습니다.

번역/편집: 권향화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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