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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타임]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곽원갑옛집
2016-03-14 09:45:32 cri

강렬한 눈빛, 현란한 주먹, 화려한 발차기…

날렵한 몸놀림과 절도있는 스텝으로 대방을 억제하는 싸움기술, 우리는 흔히 무술이라고 하죠. 남성들이라면 너도나도 한번쯤 흉내 내보고 여성들은 흔히 스크린속 화려한 액션 주인공의 모습에 마음을 사로잡히기도 하는데요. 중국의 무술하면 이분을 빼놓을 수 없죠. 바로 곽원갑입니다. 일전에 세계 최고의 무술 배우 이연걸(李連杰)이 그의 마지막 전통무술영화 "무인 곽원갑(霍元甲)"에서 곽원갑 역을 맡아 이 절세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샘을 자극했습니다.

곽원갑(霍元甲)은 청나라 말기 유명한 애국무술가입니다. 그는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미종권(迷蹤拳)의 절기(絕技)를 널리 알리는 정무체육회를 창시했습니다. 곽원갑은 뛰어난 무술기예와 강렬한 애국정신으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합니다.

천진시(天津市) 서청구(西青區) 남하진(南河鎭) 소남하촌(小南河村) 중심초등학교 부근에 위치한 곽원갑옛집은 청나라 동치(同治)초기에 세워졌습니다. 1997년 천진시정부는 곽원갑옛집을 개축하고 곽원갑릉원을 증축해 "곽원갑옛집 기념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현재 이곳은 곽원갑옛집과 곽원갑릉원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옛집은 내화벽돌과 청색기와로 된 농가 삼합원입니다. 남북향으로 된 정원에 들어서면 "복(福)"자가 새겨진 가림벽이 보입니다. 가림벽을 에돌아서면 몸채3채와 동서 곁채2채가 있습니다. 몸채의 가운데방에 들어서면 곽원갑의 영정사진(遺像)이 한눈에 안겨오는데요 그는 무인보다 문인에 가까운 서생기질이 다분했습니다. 영정옆에는 "일생의협(俠義), 절세영웅"라고 쓴 대련이 있는데요, 곽원갑의 아들 곽동각(藿東閣)이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곽원갑의 일생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가 되지 않을가 싶습니다. 서쪽방의 서재에는 곽원갑이 생전에 독서할 때 사용했던 책상과 책궤, 문방사우 등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벽에는 손문(孫文)이 정무체육회를 위해 친필로 쓴 "상무정신(尙武精神)"이 높게 걸려있습니다. 동쪽 거실에는 방구들과 이불장, 온돌탁자, 위쪽에 서랍 3개와 아래쪽에 장롱 모양의 여닫이가 있는 장방형의 탁자 등 곽원갑과 그의 가족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이 있습니다. 서쪽 곁채에는 병기와 농기구들이 있고 동쪽 곁채는 주방 및 식사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건물은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 천진 민속풍정을 체현해주고 있습니다.

곽원갑릉원은 부지면적이 40000m²로 릉묘구역, 전람구역, 무술연마구역, 휴식구역으로 나뉩니다. 곽원갑 생애사적진열관에는 곽원갑의 7세부터 42세까지의 전설적인 삶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868년 1월 18일 천진에서 태어난 곽원갑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짓는 농사꾼 집안이었지만 또한 가문 대대로 무술을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곽원갑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심했습니다. 부친 곽은제(藿恩第)는 곽원갑이 집안의 명성을 흐릴가봐 아들 곽원갑에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고 글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곽원갑은 부친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밤마다 아버지가 개인지도하는 모습을 엿보며 몰래 "미종권"을 연습했습니다. 곽원갑의 노력으로 그의 무술은 점차 강해졌는데요. 그러던 1890년 어느날 한 무술가가 그의 집을 찾아와 대련을 신청했습니다. 그때 곽원제는 줄곧 무술을 연마했고 무예가 탄탄한 곽원갑의 동생 곽원경(藿元卿)을 파견했고 결과 곽원경이 패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갑자기 곽원갑이 나서서 그 무술가와 대련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곽원갑은 빈틈없는 방어와 바람을 날리는 권법으로 상대방을 장외로 쓰러뜨렸습니다. 이번 결투로 부친은 물론 곽원갑의 형제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죠. 이에 부친은 곽원갑을 제자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무술을 전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곽원갑이 읍내에 가서 나무를 팔고 있을 때 "자릿세"을 요구하는 망나니들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이에 곽원갑은 유유히 멜대를 꺼내들더니 현장 10여명의 망나니들을 단번에 쓰러눕혔습니다. 곁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운송업을 하는 주인은 곽원갑을 고용해 가게를 돌보게 했습니다. 가게를 보면서 곽원갑은 백성들을 강탈하는 모든 조항을 취소해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에 가게주인은 크게 노해 곽원갑을 해고했습니다. 해고당한 후 그는 친구 농경손(農勁蓀)의 초대로 약종상 일을 하면서 농경손의 애국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던 1901년 천진 극장에서 활약하던 러시아 레슬러가 자칭 세계 제일 레슬러라고 하면서 중국인을 무능하다고 비하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곽원갑은 곧장 극장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러시아 레슬러는 무대에서 중국인들을 "동아병부"라고 모욕하면서 능자가 있으면 무대위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곽원갑은 무대로 올라 "'동아병부' 곽원갑이 자네랑 한판 붙어보겠네."라고 했습니다. 곽원갑의 명성을 전해들었던 레슬러는 급히 곽원갑을 무대 뒤로 청하려 했습니다. 곽원갑은 현장에서 러시아 레슬러를 질책하면서 그에게 3가지 조건을 제출했습니다. 첫째는 광고를 다시 올려 러시아인이 "세계제일"이라는 말을 취소하고 둘째 중국인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을 공식 사과하라는 것이였습니다. 이 두가지 조건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세번째 조건으로 곽원갑과 결투를 치르는 것이였습니다. 이때 잔뜩 겁을 먹은 러시아 레슬러는 곽원갑의 두가지 조건을 수락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곽원갑은 "나라가 강해지려면 무술을 연마해야 한다"는 신념으로1910년 6월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를 창립했습니다. 정무체육회는 근대적 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주로 무술을 가르쳐 중국인들의 체력을 양성하고 정신을 가다듬게 했습니다. 손중산은 곽원갑이 주장하는 신념을 높이 평가하면서 "상무정신(尚武精神)"이라는 4자를 친필로 써서 정무체육회에 선물했습니다. 곽원갑은 정무체육회를 창립한 시기에 황달이 재발하고 결핵에까지 감염되어1910년 9월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받던 중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42세입니다.

전시관은 곽원갑의 일대기를 이야기와 문물, 사진자료 등 형식으로 후손들에게 전시했습니다. 아울러 이곳은 세계 40여만명의 정무제자들과 염황자손들이 참배하는 성지로 되었습니다.

곽원갑옛집에 있는, 곽원갑이 사용했던 돌포환, 받침돌, 칼창 등 병기와 정무체육회의 회기(會旗), 회칙, 회원증서 등 소중한 문물들은 이 천진영웅 곽원갑의 강한 의협심과 뜨거운 애국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진 일각에 자리잡은 곽원갑옛집, 그곳에서 중국인들의 위상을 지켜준 애국영웅 곽원갑을 그려봅니다.

번역/편집: 권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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