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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타임]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소홍옛집
2016-03-14 09:49:23 cri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였습니다. 이날은1908년 미국 1만 5천여명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정치적 평등권 쟁취와 노동조합 결성,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날입니다. 유엔은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싸워온 이날을 기념하면서 1975년부터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했습니다. 각성한 유수의 여성들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인권 유린과 지위 불평등을 낳는 불합리한 낡은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수없이 노력해왔습니다. 그중에서 단연 중국 민국시기 4대 재원 중 하나로 불리웠던 여류작가 소홍(蕭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봉건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소홍은 자유와 사랑, 인권과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필을 무기로 짧디 짧은 30년이란 생애 100여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소홍의 본명은 장내영(張乃英)이고 1935년 소홍이라는 필명으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생사의 장(生死場)", "후란강 이야기(呼蘭河傳)"등이 있습니다. "30년대 문학의 낙신(洛神)"으로 불리우는 소홍은 그 시기 대문호 노신(魯迅)으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전도있는 여류작가"로 평가받았습니다. 훗날 그의 다수 작품은 영어, 불어, 러시아어, 일어, 조선어(한국어) 등 여러 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국내외 학자들이 중국 현대문학을 연구하는 열점이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여류작가 소홍,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있을가요? 그의 옛집에는 또 어떤 흔적과 기억을 담고 있을가요?

그럼 오늘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에서는 흑룡강성 할빈시 호란구 남2도가 204호에 위치한 소홍옛집을 찾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청나라 광서 34년(1908년)에 세워진 소홍옛집은 부지면적이 3500평방미터입니다. 옛집은 동서 두개 정원으로 나뉘는데요, 서쪽 정원은 타인에게 임대해 주었고 동쪽 정원을 소홍 가족들이 사용했습니다. 대문은 남쪽을 향해 있고 두 정워의 방을 합치면 도함 30여칸이 됩니다. 그중 동쪽 정원은 8칸, 서쪽 정원 22칸입니다. 소홍옛집은 소홍의 성장환경과 생활궤적을 꿰뚫어볼 수 있을 뿐만아니라 30년대 북방 백성들의 생활방식과 풍속습관을 알아보고 중국 현대문학을 학습, 연구하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동쪽 정원의 정문 문미(門楣,문틀 위에 가로로 대는 나무)에는 "소홍옛집(萧红故居)" 편액이 적혀있는데 이는 진뢰(陳雷)가 친필로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쪽 정원에는 5채의 몸채가 있는데 동쪽 두채는 소홍과 부모가 거주했던 곳으로 소홍이 사용했던 밥상, 화장대, 장롱, 차 탁자 등이 놓여져 있습니다. 문을 마주한 본채의 한가운데 방에는 모래로 만든 소홍옛집 최초 모형이 있습니다. 서쪽 2채 방은 주로 소홍의 일생을 보여주는 전람실로 꾸며졌는데요, 소홍의 사진들과 저서, 소홍연구 논문집, 소홍과의 깊은 인연이 있었던 소군(萧军), 단목홍량(端木蕻良), 유아즈(柳亞子) 등 인사들을 포함해 중외 명인들의 친필제사와 기념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정원의 가운데는 2미터 되는 한백옥 소홍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요, 턱을 고이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삶과 사랑, 자유에 대한 깊은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몸채 뒤에는 2000평방미터 되는 채전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소홍의 소설 "후란하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신비한 색채가 있는 뒷동산"입니다.

소홍옛집 건물구조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축조한 토목건축으로 만족 주민건축 풍격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창문은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고 창문틀 네면에는 북방 특유의 창호지가 붙여져 있습니다. 가운데 방문은 강남 물 고장의 "소주문(蘇州門)" 형식을 채용했고 뒷문은 북방 전통인 판문을 달았습니다. 실내는 북방인들이 생활하는 온돌로 되어 있고 만족 주민들의 또 다른 특색을 체현할 수 있는 연통은 내화벽돌로 지어졌으며 총 4마디로 구성되었습니다. 높이는 총 7미터로 실내 온돌과 통해 있습니다.

1986년 6월 11일에 복원해 대외로 개관한 이 소홍옛집은 원래 면적의 5분의 2정도라고 합니다. 이 대저택을 거닐면서 문득 봉건지주가문에서 태어난 소홍이 호의호식했을 것이라는 상상도 들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습니다. 지어 소홍은 민죽 4대 재원 중 운명이 가장 기구한 여성으로도 기억되고 있죠. 어린 시절 소홍은 어머니를 여의고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부친의 영향으로 억압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때 할아버지의 따뜻한 보살핌만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19살 되던 해 소홍의 부친은 정략결혼을 요구했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물건처럼 부귀와 바꾸는데 대해 불만을 표출해 결국 집글 나갔습니다. 대노한 그의 부친은 호적에서 소홍의 이름을 파버리기까지 합니다. 집도 없이 방황하던 그녀는 중학교 동창을 만나 함께 생활하다가 버림받았고 곤경에 빠질 무렵 작가 소군(簫軍)을 만나면서 창작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소군과의 생활은 입에 풀칠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고 영하 30도 엄한 추위에서도 여름 신발로 겨울을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는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1934년 소홍은 위만주국의 파시즘문화전제주의 보급에 반기를 들고 진보적인 간행물을 편집하다가 체포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소홍은 소군을 따라 상해로 가서 대문호 노신을 만나게 됩니다. 노신의 영향을 받아 그는 최초로 "소홍"이란 필명으로 초기 창작의 최고봉 작품 "생사의 장"을 발표해 중앙 문단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어 1936년 6월 소홍은 노신, 모순, 파금 등 60여명의 작가들과 연합해 "중국문예종사자선언"을 발표하고 애국주의 문예종사들을 동원해 조국 해방과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군과의 감정문제, 신체악화 등 원인으로 그는 홀연 일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단목홍량을 만납니다. 1940년 소홍은 단목홍량과 함께 홍콩으로 가서 "시대비평(时代批评)" 간행물을 창간했습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은 홍콩을 함락할 무렵 단목홍량은 소홍을 혼자두고 떠났고 소홍은 폐질환으로 앓다가 1942년에 세상과 작고했습니다. 향년 32세입니다. 소홍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슬픔과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그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가 속해있는 나라는 조금씩 조금씩 침정당했고 그가 추구해온 사랑은 유린당하거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도, 불운이 닥쳐와도 그는 창작을 이어왔고 10년이라는 불꽃같은 삶속에서100원권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소홍은 작가로서의 뜨거웠던 삶뿐만 아니라 거침없고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30년대 볼 수 없었던 신여성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나는 생과 사를 선택할 수 없지만 사랑과 삶의 방식은 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자유이고 나의 황금시대이다."

주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일과 사랑, 자유를 열망하는 작가 소홍, 그의 옛집은 그의 할아버지와 보냈던 포근한 기억도 부친과의 차가웠던 기억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일전에 유명배우 탕유(汤唯)가 주연을 맡아 열연한 영화 "황금시대(黃金時代)"는 소홍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올랐는데요, 영화 주제가 나대우((羅大佑)의 "어쩔 수 없는 일생(只得一生)"을 들으면서 오늘 "명인의 발자취를 따라서-소홍옛집"편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번역/편집: 권향화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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