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칭키스칸의 초상)
13세기 몽골제국을 건립한 칭키스칸은 중국역사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몽골족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한 일생으로서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한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칭키스칸은 몽골어로 바다와 같이 크다는 뜻이다. 1162년 몽골귀족 가문에서 태여난 칭키스칸은 본명이 테무진이다. 12세기 몽골초원은 하나 하나의 초원부락에 의해 나위여 졌는데 매일같이 폭력과 약탈, 전쟁으로 날을 이어갔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테무진이 어린시절 다른 부락과의 전쟁에서 돌아갔으며 부락의 나머지 사람들도 분분히 흩어졌다. 10살난 테무진과 남동생은 어머니와 함게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일찍 다른 부락에 잡혀갔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온 그는 초원의 가장 강대한 부락에 의탁해 생활했다. 어른이 된후 그의 안해가 또 잡혀갔는데 테무진은 직접 적들을 짓부시고 안해를 찾아왔다.
항상 포로되고 약탈당하고 죽음의 변두리에서 헤매야하는 위험한 나날속에서 생활하면서 테무진은 점차 재능과 지혜가 뛰여나고 사유가 영활하고 의지가 강한 사나이로 성장했다. 겉으로는 강한 부락에 의지하는것같이 보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민심을 얻고 인마를 모으면서 점차 자기의 세력을 발전시킨 테무진은 27살되던해에 독립된 부락을 건립하고 부락 수령 "칸"으로 되였다.
10여년간 단련 끝에 지혜와 용기가 모두 겸비된 테무진은 기율이 엄하고 전투력이 뛰여난 군대를 건립하고 하나 하나의 강대한 부락을 전승하면서 몽골초원에서 가장 큰 통치자로 부상했다. 1206년 테무진은 성대한 초원 대집회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대칸 직위에 즉위한다고 선포했다. 그가 건립한 나라는 대몽골국으로 명명되였으며 그 자신은 칭키스칸으로 불려지게 되였다.
이에 앞서 초원에 분포된 각 부락들은 모두 자기들의 명칭을 갖고 있었는데 몽골부는 그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칭키스칸이 각 부락들을 통일한후 "몽골"이라는 명칭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강대한 몽골국 공동체가 형성되였다. 당시 몽골국 범위에 든 지역은 동쪽은 중국북부 흥안령까지이고 서쪽은 아시아의 복지인 알따이 산, 남쪽으로는 현재 중국내몽골 중부의 음산, 북쪽은 지금의 러시아 경내의 벵갈호까지였는데 그 면적이 아주 넓었다.
칭키스칸은 건국후 원래 산재했던 원시부락 형태를 고치고 집권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몽골문자를 창립하였는데 문자는 끊임없이 보완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칭키스칸은 또 법률을 제정해놓고 나라와 군대를 엄격히 다스리였으며 국가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나라의 발전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에는 천여년동안 한족들이 중원을 통치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수민족들이 건립한 정권들도 공존하고 있었다. 예하면 요, 서하, 금 등 정권이다. 칭키스칸은 세력을 확대하고 재물을 약탈하기 위해 이런 정권에 대해 계속 전쟁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몽골대군은 국토를 확대하였다. 1219년 중아시아를 향해 진공을 발동하면서 칭키스칸은 아시아 유럽대륙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서쪽으로 진군하는 몽골군의 전쟁은 가혹했다. 가는곳마다 광풍이 휘몰아친 격이였고 도살과 약탈은 끝일새 없었다. 번화하던 도시는 황막한 모습만 남겼고 회멸적인 타격으로 아시아와 유럽동부의 많은 지역은 아주 긴 시간동안 발전이 정지된 상태였다.
하지만 칭키스칸의 계속되는 군사적인 추진으로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이해의 강기슭까지 강제적인 제거 조치를 실시하는 바람에 동서방의 경제와 문화교류에는 역사적으로 있어본적 없는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쳐들어가는 기간 산을 만나면 길을 닦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건설해 동서방 교통 조건을 개선하는데 큰 기여하였다. 정보를 전하고 물품을 운송하기 위해 중원지역에서 자주 이용하는 교통제도인 "역참"을 서방까지 이어놓아 동서방 관리들과 사절들의 내왕에 편리를 도모하기도 했다.
칭키스칸은 또 중요한 도로에는 도로관리 전문 인원을 배치하는 등 조치를 취했으며 상인들의 내왕 안전을 담보하는 법령까지 반포했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이란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사이에서 사람들은 머리에 금접시를 이고 내왕하면 그 어떤 위협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동서교통이 원활하게 소통되고 거기다 안전상황까지 좋아지니 무수한 상인들이 몽골 대 사막에 찾아들었다. 서방의 약, 직조품, 천문역법, 과학기술이 중국에 전파되였는가하면 중국의 많은 발명도 서방에 전해졌다. 동시에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에 진입하였고 대량의 소수민족들이 중원지역으로 이민을 갔다. 그들 모두는 공동히 중국의 경제문화 발전에 중요한 기여하였다.
1227년 65살에 나는 칭키스칸은 전쟁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칭키스칸의 영구는 그가 생전에 정해놓은 묘지로 이송되였는데 이송 도중 닥치는 대로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을 모두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시신을 안치한후 말 만필을 동원해 묘지를 평지로 만든 후 그 위에 풀을 심었는데 이듬해 묘지에서 자란 풀과 주위의 풀이 한데 어울어져 분간이 안되게 해놓고는 묘지를 수건한 사람들과 시신을 이송한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칭키스칸의 묘지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는 고고학자들한테 남아있는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칭키스칸의 공과를 돌이키면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이 위대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인 그를 존중하지 않을수 없다. 그는 책을 읽은 경력은 없지만 자신의 탁월한 총명과 재능으로 환난의 경력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다른 나라의 방침과 전략을 정복하고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 몽골제국을 건립하였다. 그가 마련해놓은 기초위에서 그의 손자 후비라이는 중원의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건립하였는데 중원지역에서 첫번째로되는 한족이외의 소수민족이 집권한 정권이 나타났다. 중국의 봉건역사는 이렇게 다시 쓰이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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