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우(項羽기원전 232~202)는 진조 말기 의병의 걸출한 수령이고 초(楚)군의 통솔자였다.
진나라의 폭정을 뒤엎은 뒤, 항우는 유방(劉邦)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종국적으로 실패하였으나 그의 용맹과 패기는 오늘날까지도 의연히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고 있다.
무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항우는 수백킬로그램의 솥도 들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무예를 즐긴 항우는 삼촌 항량(項梁)을 따라 병법을 배웠다. 기원전 209년, 진나라에서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항우는 삼촌 항량을 따라 봉기군에 가입하였다. 전쟁에서 항우는 용감하고 지혜롭게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얼마 되지 않아 벌써 봉기군의 수령이 된다. 진나라의 폭정을 뒤엎는 판가리 전투에서 항우의 봉기군은 진나라군을 정면 공격하여 유방이 인솔하는 봉기군이 진나라 도읍 함양을 탈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유방이 함양을 탈취하고 나서 진왕조는 멸망했으며 정권 탈취를 위한 항우와 유방간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항우는 결국 유방에게 전패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용맹하지만 지략이 부족하고 고집이 센 항우는 부하들의 충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이는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감정과 의리를 중히 여긴 항우는 후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항우의 용기에 언급하여 중국사람들은 흔히 <파부침주>(破釜?舟)란 말로 형용하는데, 밥솥을 부수고 배를 침몰시키고 전쟁에 임한다는 말이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대군을 통솔해 진나라 도읍 함양(咸陽)으로 진군하던 도중 장하를 건너간 후 장령들에게 삼일간의 식량만 남겨놓고 밥 짓는 솥을 깨어버리고 배를 침몰시킨 뒤 <국가의 흥망은 이번 싸움에 달렸으니 승리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고 호소했다. 퇴전길이 없게 된 초군은 생사결단의 각오로 진나라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파부침주"(破釜沈舟)란 고사성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항우는 싸움에서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지략이 부족했다. 항우와 유방은 진나라 토벌전에서 의형제를 맺고 서로 지원했으며 먼저 함양에 쳐들어 간 사람을 왕으로 모시기로 약속했다. 함양을 진공하는 도중, 40만 대군을 거느린 항우는 투항하는 진나라군을 난폭하게 대했는데 항우의 초군에 큰 원한을 품은 진나라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반항하여 초군의 진군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0여만의 군대밖에 없는 유방은 친구를 널리 사귀고 포로병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정세를 잘 간파하여 출병했는데 항우에 앞서 함양에 쳐들어갔다.
유방이 한발 앞서 함양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접한 항우는 노발대발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함양 부근의 홍문에 이르렀다. 그는 모사의 제의를 받아 들여 피로연을 베풀어 유방을 암살하려 했다. 항우의 음모를 미리 간파한 류방은 연회에서 공손하고 경건한 태도로 함양을 양보하는 체 하며 항우를 미혹시켰다. 연회상에서 모사가 항우에게 몇번이나 암시했으나 의리를 중히 여긴 항우는 결국 유방을 놓아주고 말았으니 호랑이를 산에 놓아보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고사에 이름 있는 "홍문연"이다. "홍문연"은 항우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보여준 반면, 고집 세고 부하의 충언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으며 우유부단한 그의 약점도 보여주었다. 유방을 살해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놓쳐버린 항우는 결국 자기 손으로 원수를 놓아준 셈이다.
항우는 함양에 들어간후 서초패왕으로 자처하고 유방을 한왕으로 봉했다. 그뒤 한숨 돌린 유방은 항우에 반기를 들어 "초한전쟁"이 벌어졌다. 최초 항우는 유방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세에 놓였으나, 고집이 센 항우에 실망한 수하 모사와 장령들은 분분히 그의 곁을 떠났다.
반면, 인재를 소중히 여기고 민심을 얻은 유방은 점차 강해졌다. 기원전 202년, 쌍방이 벌린 결사전에서 한나라군은 초나라 군영을 포위했다. 유방은 한밤중에 초나라 노래를 불러 초나라군을 미혹시키는 전술을 꾀했다. 초나라 군사들은 노래를 듣자 고향이 점령당해 친인들이 체포된 줄로 알고 분분히 도망쳤다. 고사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전패한 항우는 슬프게 노래를 부르며 그의 애첩 우희(虞姬)는 항우가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자결한다. 후세에 길이 전해진 애정 비극 "패왕별희"가 연출된 것이다.
항우가 포위를 뚫고 오강까지 도주했을 때 한나라 군이 거의 따라잡았다. 이때 한 어민이 그를 고향에 태워다 주겠다고 말했으나 항우는 배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무슨 면목으로 고향사람들을 대하겠느냐"고 한탄하며 장검을 뽑아 자결했다.
항우는 패군의 장령이였지만 천 여년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그의 절개를 더없이 경모하고 있다. 그가 죽은 뒤 송나라 유명한 여류 시인이었던 이청조(李?照)는 "살아 인중 호걸이었으면 죽은 뒤에도 귀신 중의 영웅이 되어야 하거늘, 사람들이 지금도 항우를 그리는 것은 그가 구차한 모습으로 강동에 돌아가지 않았음이었으리"란 시를 써 그를 높이 노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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