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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대 황후 완용 60년 만에 다시 남편 곁으로
2006-11-02 23: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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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서릉에 묻힌 완용의 유상)

청나라 말대 황후 완용(婉容, Wan Rong)이 사후 60년 만에 다시 그의 남편이었던 말대 황제 아이신지료 부의(愛新覺? 溥儀)의 곁으로 돌아왔다. 10월 24일, 완용의 의관은 청서릉 화룡황가릉원에 묻혔는데 유물로는 완용의 생전 유상 한장뿐이었다.

궈부뤄 완용(郭布羅 婉容)은 자가 모홍(慕鴻), 애칭이 식련(植蓮)이었다. 완용은 1906년 10월 21일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그의 외할아버지 아이신지료 육랑(毓朗)은 건륭황제의 장남 영황(永璜)의 5대손이었으며 청나라 말기 권세가 큰 인물이었으며 완용의 부친 영원(榮源)도 조정 관원이었다.

1908년부터 1922년 사이 완용은 베이징과 천진 두 곳에서 생활했으며 사숙과 신식 학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단정하고 미모가 출중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바둑, 글, 그림 등에 모두 숙달한 완용은 당시 만족 귀족 여성 중에서 꽤나 유명했다.

1922년 3월 10일, 완용은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12월 부의와 결혼식을 올렸다.

1924년 10월, 청나라의 통치가 무너지자 완용은 부의와 함께 황궁에서 쫓겨났다. 1932년 3월 9일 완용은 부의를 따라 장춘에 왔으며 위만주국을 세웠다. 1934년 3월 1일, 완용은 위만주국이 위만주제국으로 개명되자 "강덕황후"(康德)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음란 소문"에 휘말려 "냉궁"(冷宮)에 처박히게 되며 그때로부터 아편과 눈물로 고독을 달래게 된다

완용은 1945년 8월부터 1946년 6월 사이 길림 각지를 떠돌아다니다가 1946년 길림 연길(延吉)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완용이 죽은 뒤 그의 시신은 낡은 돗자리에 말려 부근 산비탈에 묻혔다고 한다. 해방 후 현지 정부는 여러 차례 이 말대 황후의 유골을 찾으려 조사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완용의 유물이란 그가 생전에 썼던 손거울 한개 뿐이다. 하지만 이 손거울은 건설 준비중인 부의기념관에 수장되므로, 청서릉에는 완용의 생전 유상 한장만 묻혔다.

부의는 생전에 완용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완용의 남동생 윤기(潤麒, 95세)는 매형의 유언에 좇아 근 10년의 노력을 거쳐 청서릉(淸西陵) 측과 합의를 본 뒤 청서릉내의 화룡황가릉원에 부의와 그의 황후 왕비들을 위해 릉을 만들었다.

청서릉에는 옹정雍正),가경(嘉慶), 도광(道光), 광서(光?), 선통(宣統) 5대 황제가 안장돼 있었다. 청나라 말대황제 부의는 1967년에 세상을 뜬 뒤 최초 팔보산(八寶山)에 묻혔다가 그 후에 다시 청서릉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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