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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학파의 창시자 노담(老聃)
2006-12-01 13: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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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담의 초상화)

노담은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다. 세인들은 그를 노자(老子)라고 부른다. 그의 출생일과 사망일은 분명치 않다. 노담은 춘추(기원전 770년-기원전 476년) 말년 초 나라(楚國) 사람이다.

전한데 의하면 노담은 귀와 눈이 크고 이마가 넓으며 입술이 두텁다고 한다. 노담은 주 나라(周朝)에서 소장된 책을 관리한 적이 있었다. 직업상 관계로 노담은 지식면이 넓어 명성이 높았다. 공자는 젊은 시절 노담을 찾아가 그한테서 주 나라의 예의를 배웠다. 후에 노담은 주나라 왕실이 날이 갈수록 쇄락해지는 것을 보고 개국 수도인 낙양(洛陽)을 떠났는데, 함곡관(函谷關)을 경과하는 도중 노담은 <도덕경(道德經)>의 상, 하편을 저술했다. 그후 기청우(騎靑牛)를 지나면서 주 나라를 벗어난 후 그 행적이 사라졌다. 어떤 사람은 노담이 60살까지 살았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200여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어쨌든 그가 장수했다는 것만은 기재에 공인된 사실이다. 노담이 장수한 것은 그가 마음을 비우고 도덕수양에 정진한 것과 관련이 있다.

<도덕경>을 일명 <노자>라고도 부르며, 자수로 5천여자에 달하는데 내용이 방대하다. 이 저서는 중국 고대 문화의 중요한 유산이다. 노담은 소박한 유물주의 사상가이다. 중국에서 노담은 처음으로 <도(道)>를 철학의 최고 범주로 간주했다. <도>는 사람이 가는 길을 뜻하며 사통팔달하다는 의미를 가지기에 당시 사람들은 도를 법규로 삼았다. 노담은 자연 변화,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관찰하고 여기에 <도>라는 새로운 함의를 부여했다. 노담은 <도>는 가장 진실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서 모든 구체적인 사물 산생의 최후 근원이 된다고 인정했다.

<도덕경>은 소박한 변증적인 관점으로 일관되여 있는데 이는 노자의 철학사상에서 가장 정채로운 부분이다. 노담은 사물의 존재는 고립된 것이 아니며 호상 의존하고 연계를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노담은 <도덕경>에서 사물의 전화 법칙을 천명했다. 그는 복과 화는 서로 전화될수 있으며 화속에 복이 있고 복속에 화가 있다고 했다. 노담은 사물의 양의 축적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주 작은 종자도 큰 나무로 될수 있으며 널려있는 흙도 높은 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곤난앞에 무릎 꿇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반드시 곤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사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노담은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군대가 주둔한 곳은 가시덤불만 자라며 큰 전쟁을 겪은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고 했다. 노담은 또한 통치계급의 무절제한 횡포와 폭행을 반대했다.

노담은 일찍 자신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이상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즉 나라는 작고 백성도 적고 병기는 있으나 사용하지 않고 수레와 배가 있어도 타지 않으며 백성들은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히 자며 이웃 나라의 백성들과 내왕하지 않고 문자 사용이 필요되지 않고 사람들이 끈으로 일을 기록하는 시대가 바로 이상적이 사회라고 했다. 노담의 이 이상은 소극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춘추시기 끊임없는 전란에 대한 노담의 염오감을 보아낼 수 있으며 당시 평온하고 안정된 사회에 대한 자작농들의 지향을 알수 있다.

노담의 철학사상은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의 정치사상은 후에 진보적인 사상가, 공상적인 사회개혁가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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