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비의 동상)
악비(岳飛)는 자가 붕거(鵬擧)이고 상주(相州) 탕음(湯陰) 출신이다.
북송(北宋) 말에 금(金) 나라 군사의 침입에 맞서 각지에서 의용군이 일어나자 1129년 악비는 2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 나라에 항격했다. 금 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속해 전공을 세운 악비는 1134년 조정에 글을 올려 북벌을 주장했다. 북벌을 진행해 양양(襄陽)을 수복하자는 그의 주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그 해 5월 악비는 3만명에 달하는 악가군(岳家軍)을 인솔해 가지고 북벌의 길에 올랐다. 먼저 양양을 수복한 악비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다. 8월 조정은 악비를 정원군(靖遠軍) 절도사로 임명했다. 당시 금나라 군대는 악비가 거느린 악가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만 접하면 인차 퇴각했다.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악비는 계속 진격해 빼앗긴 중원을 수복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140년 금 나라는 10대 군을 네갈래로 나뉘어 남송을 침범했다. 악비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금 나라에 항격해 나섰다. 이 전쟁에서 악비가 거느린 악가군은 다시 위세를 떨쳐 금 나라군대를 물리치고 중원을 수복했다.
1141년 사기충천한 악가군이 개봉을 함락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금 나라에 투항하려고 하던 송고종(宋高宗)과 재상 진회(秦檜)가 악비에게 철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악비는 승전을 눈앞에 두고 철군하는 것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격이라고 통탄을 했지만 조정의 명령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철군한 뒤 악비는 군사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진회는 악비의 명장 장헌(張憲)이 모반을 꾀한다고 모함하면서 먼저 장헌과 악운을 옥에 가둔 후 이어 악비도 감금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악비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송고종과 진회는 악비에게 많은 죄명을 달아 그를 독살했다. 1162년 송효종(宋孝宗)이 즉위한후 악비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하고 예의를 갖추어 제를 지냈다.
악비가 우국충정을 격조높이 토로한 <만강홍(滿江紅)>은 천고절창(千古絶唱)으로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악비는 <만강홍>에서 충만된 자호감과 신심을 가지고 청춘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적의 아성을 짓부셔 잃어버린 국토를 찾아야 한다고 우국지사들에게 호소했다. 악비가 남긴 저서로는 <악무목유문(岳武穆遺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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