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무술
무술은 그 정의가 광범위하다. 현재 무술의 작은 함의는 중화무술을 가리킨다. 중화무술은 체계적 동작, 씨름과 싼다(散打, 중국 무술의 하나. 발과 주먹으로 차거나 쳐서 승부를 겨루는 종합 격투기)를 포함한다.
무술은 단순히 사람들의 투쟁중 간단한 격투 혹은 자위동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중화무술은 천백년 문화의 연마를 거쳐 형성된 독특한 인체문화로서 중국전통철학과 논리를 사상기초로, 전통병학과 의학을 과학기초로 한 내용이 아주 풍부한 운동이다. 무술은 유파가 많고 권법이 다양하지만 그 표현형식은 두가지로 나뉜다. 바로 맨손과 무기를 쥔 상태에서의 공격, 방어 동작이다.
무술의 기원
무술은 중국에서 역사가 유구한 바 그 형성은 중국 원고선조의 생산노동에서 기원되었다. 고대 사람들은 수렵 생산활동중 점차 패기, 찍기 등 기능을 누적하게 되었는데 비록 이런 원시적 형태의 공격, 방어기능은 저급적이고 생산기능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무술기술 형성의 기초로 되었다. 씨족사회에 이르러 부락사이의 전쟁이 자주 일어나면서 전쟁터에서의 박투경험은 끊임없이 총화를 가져왔고 매개의 동작은 연마, 전수되면서 점차 무술이 형성되었다.
무술은 독립적인 사회문화현상으로서 중화민족문명과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이다. 상조시기 "武舞"가 출현했는데 이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사기를 북돋아주는데 쓰였다.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제후들의 쟁탈은 전쟁터에서의 기술의 응용이 각별히 중시를 받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제환공은 봄과 가을 두 계절마다 "角試"라는 무술대회를 통해 천하영웅들을 선발했다.
당조시기로부터 무거제(武擧制)의 실행은 무술의 발전에 촉진작용을 일으켰다. 배민(裵民)장군의 검술이 제일로 불렸을때 배민의 검술, 이백의 시가, 장욱의 초서 등은 당조의 "3가지 최고"라는 미칭을 가졌는데 여기서 무술의 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한편 송원시기 민간의 무예조직을 주체로 한 민간 무술연습활동이 흥기되었는데 곳곳에서 무술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상업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강호(江湖)에는 무술표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명청시기는 무술대발전 시기로서 각종 유파가 설립되었고 권법도 더욱 다양해졌으며 동시에 태극권, 형의권, 팔과권 등 주요한 권법체계가 형성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무술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중국 근대 스포츠의 유기구성부분으로 발전되었다. 민국시기에 민간에서 수많은 권사(拳社), 무사회 등 무술조직이 출현했고 1928년에는 남경에서 중앙국술관(국가무술관)이 성립되었으며 1936년에 이르러 중국무술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출연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후 무술은 활력을 띠어 1956년에 중국무술협회에서는 무술협회, 무술팀 등을 건립해 전례없이 광범위한 군중성 무술활동망을 형성했으며 무술계의 발전에 넓은 길을 개척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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