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흔적
이혜선
모든것에는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있다. 한 개인의 문학인생도 마찬가지일것이다. 나는 내가 받은 충격이 내 문학관에 준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아마도 동세대의 작가 상당수가 느낀 충격이 아닐가싶다.
첫번째는 아마도 1986년말이였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중국은 개혁개방의 십년을 맞이해 국문을 활짝 열고 동서남북으로 새로운 사조의 세례를 받고있었다. 서방문화의 충격이 심하여 정치, 경제는 물론 문학과 예술, 철학, 륜리 등 제 분야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각 분야에는 론쟁이 그칠 사이가 없고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심했다. 문학분야에서는 인도주의사조가 물결처럼 흘러들어 인성의 개념, 인성과 계급성, 인성론과 인도주의, 인간의 생존권에 대한 인정 등 문제에 대한 대토론이 진행되였다. 짧은 시간내에 관념들이 급속도로 변해갔다. 그에 반해 우리의 의식형태는 획일적인 리념에 얽매여 너무나도 진부했고 사회의 요구에 비해 교육의 변화는 역시 너무 늦었다. 사람들은 뭔가 서책에서 답을 찾고싶어했다. 책들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중국과는 판이한 사회체제를 갖고있는 서구쪽의 철학, 문화서들이거나 중국도서들이기는 하지만 정치운동시기에 억눌려 빛을 보지 못했던 가장 전통적인 문화서들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의 의식은 이데올르기의 면사포를 벗기고 뭔가 인간과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것을 찾고싶어했다.
그때 나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청년작가대표단의 일원으로 북경 교외인 풍대의 한 호텔에서 전국청년작가대표대회에 참석했다. 아직 문학에 대해 별로 아는게 없고 다만 젊음의 열정때문에 문학을 열애하고있었다. 계획경제시대의 타이틀이 그대로 있는 시기여서 아마도 우리에게는 자신의 개체적인 생명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문학이 선택된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대회측으로부터 많은 책을 선물로 받았다. 각 출판사들에서 책을 팔기도 했는데 책매대는 늘 대표들로 북적거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대표들은 오랜 시간 뻐스를 타고 왕부정서점에 달려가서 책을 사오곤 했다. 서점에 안가면 뭔가 뒤떨어지는듯한 초조감이 팽배했다. 우리 팀도 왕부정서점에 갔는데 사르트, 시몬느 드보브아르, 칼 융, 프로이드, 니체 등 많은 서방철학가들의 저서와 《주역》 등 중국의 가장 본질적인 전통문화에 대한 저서들이 현란하게 꽂혀있었다. 연변에 돌아오자 책속에 파묻혔다. 알둥말둥했지만 열심히 읽었다. 연변에 지식청년세대들로 조직된 문학동인회가 섰다. 나도 누군가에 의해 그 단체에 가입했다. 30여명의 청년작가들이 작고 비좁은 단층집에 모여 니체요, 프로이드요, 사르트요 玖庸?쟁론했다. 체계적인 지식과 지도가 없이 읽는 책이여서 한계점이 많았지만 그 자체대로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배웠던 모든 획일적인 정치교육과 용속적인 이데올르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명을 생명 그대로 리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말하자면 계획경제시기 군체의식이 개혁개방, 시장경제시대의 개체의식으로 전환하는 큰 전환기이기도 했다.
두번째 충격은 아마도 1989년 북경로신문학원에서의 공부하던 시기였던것 같다. 그때 나는 민족적인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88년도에 연변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우리 민족 력사서를 받아 읽고 그 충격의 여파를 가지고 북경에 갔었다. 타민족문화의 중심에서 수개월 혼자 있으면서 소수민족의 정체성의 갈등을 앓았다. 연변에서가 아니라는 점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많은 한족작가들을 사귈 기회가 있었다. 그때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곤 했던 막언, 여화, 류진운, 지자건, 홍봉 등 작가들도 같은 시기 로신문학원에서 공부했고 류심무, 가운로 등 저명한 작가들이 강의를 했다. 이때 북경에서 큰 사건들이 터졌다. 그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작가로서 국가, 민족, 개인, 이데올르기, 행복, 권리 등등 엄청난 문제를 고민했다. 기성관념들이 파편으로 남고 머리속은 정리되지 않아 뒤죽박죽이였다. 당시 전국문단을 휩쓴 신사실주의사조에 깊이 젖어들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공리적인 문학, 일방적인 인간승리의 문학에 대한 배반이기도 했고 내가 믿었던 모든 론리에 대한 불신과 무기력함, 혹은 반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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