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특집을 내면서


     두 곳 해상의 거리는 100해리 미만이다. 한국의 인천에서 배로 출발하면 중국 산동의 동단 위해까지는 하루 밤이면 닿아 이를 수 있다.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는 옛날 수․당(隋․唐) 시기부터 바다 위의 내왕이 빈번했다. 많은 신라인은 바다를 건너 산동, 강소, 복건 등 대륙의 연해 일대에 발자국을 찍었다. 신라인의 집거지 ‘신라방(新羅坊)’은 이 무렵 대륙의 연해 일대에 대량으로 출현하고 있 다.

     그때 대륙과 조선반도로 향한 관방 사절과 민간 무역인의 행렬은 아주 빈번했다. 와중에 반도의 유학생과 구법승은 대륙으로 향한 또 하나의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옛 신라인이 다녔던 이 바닷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금(遼․金)의 간섭 으로 송(宋)나라와 고려의 내왕은 모두 바닷길을 이용하게 되면서 바닷길은 대륙과 반도를 잇는 유일한 교통로로 되었다.

     해상의 이 ‘실크로드’는 근대에 약 반세동안 단절되었다가 1990년 다시 개통되었다. 중국과 한국 해상의 최단 거리에 있는 위해 는 이때 ‘페리’로 또다시 세간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2017년 현재 중국에는 천진과 상해, 대련, 일조 등 10여 곳에 한국으로 통하 는 배편이 운행되고 있다. 위해는 현재 인천과

평택에 ‘페리’를 운영, 계속 대륙과 반도 바닷길의 거점으로 되고 있다.

     얼마 전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특별취재팀은 중한수교 25주년에 즈음하여 위해, 연태 등 지역을 집중 답사하고 그제 날 신라인 이 족적을 남겼던 해상 ‘실크로도’의 옛 길을 다시 더듬었다.

     옛날과 오늘의 이야기를 찾아 옛 모습을 읽고 내일의 모습을 그려본다.

(취재팀: 조설매, 권향화, 김호림)

     

-첫번째 이야기-


     바다에 떠도는 배위의 그 마을의 이야기

     위동(威東) 페리가 도착한 위해(威海)의 부두에는 고동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항운터미널에 나타난 인파가 더구나 갑작스러운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린 탑승객은 거개 산더미 같은 큰 짐짝을 들고 있었다. 이 짐짝은 곧바로 부두 왼쪽의 화물 위탁소에 옮겨지고 있었다. 미구에 탑승객들은 가벼운 배낭만 든 채 시내로 사라진다.

     날마다 이맘때면 부두에 벌어지는 정경이다. 예전에는 한국인도 있었다고 터미널 부근의 식당 여주인이 밝힌다.

     “그때는 우리 식당에 혹간 한국인들이 와서 밥을 먹기도 했지요.”

     식당 여주인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고 말한다.

     “따이공(代工)이라면 현지인밖에 없어요. 현지인들이 자주 우리 식당을 찾지요.”

     언제부터인가 한국 따이공은 바다에 잠적한 듯 더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식당에는 아직도 그들을 부르듯 그냥 한글 이름의 간판이 걸려있었다.‘스낵’을 ‘스색’으로 잘못 적은 간판이 뭔가 이상한 뉘앙스를 주고 있었다.

     따이공(代工)은 중국말로 ‘물건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농산물과 화장품, 의류 등을 거래하는 보따리상을 말한다. 중국과 한국 여객선이 운행하면서 이런 작은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중국과 한국에 생겼다.

     페리는 위해에서 처음 개통될 때부터 이 민간무역의 추형을 만들고 있었다. 페리의 주요내원은 친척방문으로부터 노무 그리고 다음은 관광 이런 순서로 발전했다고 위해위동(威東)항운유한회사의 직원 손건군(孫建軍) 씨가 말한다. 손건군 씨는 페리가 개통하던 그 시초부터 위동항운회사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처음에는 동북의 조선족들이 우리 페리의 주요한 여객 내원으로 되고 있었지요.”

     1990년 9월 15일, 중국과 한국 항로가 위해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아직 중국과 한국 수교 보다 2년이나 이른 시점이었다. 그때까지 중국에서 한국행은 바다 건너의 일본이나 대륙 남쪽의 홍콩을 경유하는 등 우회노선을 걸어야 했다.

     직항운행을 하는 위해의 페리는 중국과 한국의 거리, 시간, 비용을 단번에 크게 절감하고 있었다. 배는 또 항공편에 비해 물품을 훨씬 많이 소지할 수 있는 우점이 있었다.

     필경 페리는 탑승객 숫자와 출항 횟수가 모두 한정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배표는 한때 ‘별 따기’처럼 되었다. 배표 한 장을 얻으려면 밤부터 매표소에 줄을 서야 했다. 배표 하나의 구매권이 50달러의 가격으로 시중에 나돌기까지 했다. 배표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장장 한주일이나 멀쩡하니 위해에 머물려야 했다.

     사실상 페리를 통한 민간인의 작은 무역은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따이공은 첫 탑승객 조선족으로 출마했고 또 한국인의 신분으로도 나타났으며 이어 현지 한족으로 파급되었던 것이다. 따이공이 탑승하던 페리도 나중에 북방의 대련(大連), 천진(天津) 그리고 남방의 연운항(連運港), 상해(上海) 등 십여 개의 항구로 부쩍 늘어났다.

     그때 그 시절, 신라의 사절과 무역인, 유학생, 구법승들도 이처럼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에 입국했던 것이다. 그때도 바닷길은 육상의 도로보다 가까워 역시 시간과 거리,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신라인들이 개척한 바닷길은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 나아가 일본을 동서방의 ‘실크로드’로 되고 있었다.

신라인과 일본인은 대륙 연해의 항구에 이른 후 다시 서울 장안으로, 또 오지의 불교 성지(聖地)로 향했다. 대륙의 육상 교통도로 연선에는 그들을 접대하던 장소가 따로 생기고 있었다.

     산동성 등주(登州)에 사절이 숙박하던 신라관(新羅館)이 있었고, 청주(靑州)에는 구법승이 머물던 신라원(新羅院)이 있었다. 구법승들은 많은 경우 이 신라원처럼 사찰에 기거했다. 위해 부근의 영성(榮城) 신라사(新羅寺)가 바로 그러하다. 당나라 때 일본의 고승 원인(圓仁)이 구법의 길에 이 신라사에 들렸었다고 그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전한다.

     어쩌면 옛날의 그 바닷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페리는 중국과 한국 교류의 교두보로 되었다고 장천민 씨기 거듭 말하고 있었다. 페리를 통한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는 종국적으로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판공실 주임 장천민(張天民) 씨는 페리가 무엇보다 위해의 지방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페리의 운행은 이곳 현지의 지방 경제를 활성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해의 많은 식당과 상점, 가게는 이 때문에 운영되었지요.”

     한때 위해의 옛 국제항운터미널 부근은 언제나 흥성했다. 따이공 등 탑승객을 상대한 여인숙과 식당, 가게, 물류업체 등에 수천 명 심지어 1만여 명의 인원이 직간접으로 종사했다는 불완전한 통계가 있다.

     위해와 이웃한 연태(連臺)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 연태 북마로(北馬路)의 옛 국제부두 부근에는 페리의 탑승객을 상대하여 먼저 식당이 일어섰고 뒤미처 농산물 가게와 물류와

무역 업체가 따라 나섰다. 마트와 직업소개소 등 서비스업체도 북마로에 진출했다. 북마로는 나중에 일명 ‘한국동네’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점심 무렵 위해에 도착한 페리는 인천편이었다. 인천편은 일요일과 화요일, 목요일 도착, 평택은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 도착이라고 한다. 따이공이 찾아간 화물 위탁소에는 한글이름의 가게가 따로 있었다. 따이공을 기다리는 인원과 차량이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따이공의 물품은 지역별과 상품별 행선지가 다르기 때문에 이곳만 전문으로 하는 가게라고 한다.

     일부 가게는 농산물을 특별히 진열하고 있었다. 인제 물건을 인계하고 다시 배에 오르는 따이공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따이공은 페리가 출발하는 오후 7시까지 갖고 온 물품을 처리하고 다시 갖고 갈 물품을 모두 배에 실어야 한다. 물건을 인계한 후 현지의 집에 다녀와서 다시 배에 오르려면 일정은 더구나 빠듯하다. 지인이나 친척이 따이공의 도우미로 터미널까지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페리에는 약 7백 명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날의 탑승객은 300명 미만인 것 같았다. 와중에 따이공은 수십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따이공은 열이면 열 모두 짐짝이 유달리 커서 탑승객들 속에서 금방 가려낼 있었다. 따이공은 거개 배를 대륙과 반도를 오가는 숙박소로 삼는다고 한다. 페리는 말 그대로 바다 위에 떠도는 ‘이동 마을’로 되고 있는 것이다.

     따이공이 위탁소에 풀어놓은 짐짝에는 화장품과 밥솥, 의류가 나오고 있었다. 일부 짐짝에는 부피가 작은 스카프 뭉치도 있었다. 인제 그들이 위해의 출항 페리에 가져갈 짐에는 이를 대신하여 중국의 농산물이 들어가게 된다.

     여느 따이공처럼 짐을 하나 만들고 싶으니 어떻게 해야 하냐고 위탁소의 가게 주인에게 진지하게 문의했다. “페리를 타고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요, 배표 값이라도 만들려면 뭘 갖고 가야 될까요?”

     가게 주인은 대뜸 마른 고추와 녹두, 땅콩, 참깨, 흑두 등을 권장했다. 이런 물품은 가게에 각기 5㎏짜리 비닐포장으로 되어 있어서 내용물을 쉽게 선별할 수 있었다. 한국에 들여가는 품목은 총량 50㎏, 품목별 5㎏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뭐가 아쉬운지 연신 한숨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는 가게에 수십 가지의 농산물을 진열할 수 있었는데…지금은 장사가 잘 안됩니다.”

     그때는 귀향길에 오르는 한국인들도 배에 오르기 전 가게에 들려 귀국선물로 특산물을 구매했다고 한다. 실제 페리를 이용하는 한국인은 지금도 중국행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1백명 지어 그 이상으로 헤아리는 단체는 항공편보다는 페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해에는 ‘해신(海神)’으로 불리는 신라인 장보고(張保辜, ?~846)의 유적이 있어 한국인들이 산동에 와서 관광하는 주요한 목적지로 되고 있다.

     최초에 페리의 탑승자 명단에 등장한 한국인들은 기업인들이 적지 않았다. 페리가 개통했던 1990년대 초 위해와 부근 연해의 연태, 청도 지역에 한국의 제조업체가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한국과의 근접성과 물류 이동의 편의성 때문에 페리를 선택하는 거죠.”

     연태한인상공회 사무국장 강경욱 씨의 말이다. 현재 연태에 진출한 한국 제조업은 연태 한국 기업의 거의 반수 정도인 450개를 차지한다. 와중에 일부 한국인은 아직도 페리를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밤에 출발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페리는 여전히 항공편에 못지않은 우세를 갖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국행 배편에 인원이나 물류가 모두 꽉꽉 찼습니다. 수출은 페리 같은 선박 노선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한국 제조업체의 대량 이동이 시작되었다. 현재 연태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은 약 1만 5천명으로 10년 전보다 반 정도 이상 줄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페리를 이용하던 탑승객 역시 반 토막이 나고 있었다. 중국 산업구조의 변화와 한국의 경제위기에 ‘습격’을 받았고 이어 한국발 ‘사드’의 ‘직격탄’을 받았다. 또 중국과 한국 세관의 통관물품에 대한 엄격한 관리도 가세했다. 탑승객의 일원이던 큰 단체는 올해 거의 사라졌고 탑승객의 반수 지어 대

부분을 차지하던 따이공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었다.

     “양쪽의 세관에 어느 품목이 걸릴지 몰라요. 퇴짜를 받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가게 주인은 관광을 떠난다면 아예 여행 소지품만 들고 배에 오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상처럼 배를 타는 따이공도 자칫하면 적자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페리에 편당 400명이나 500명에 이르던 따이공이 지금은 100명 정도로 줄어들고 있는 원인이었다.

     가게 주인의 이 말은 부근의 식당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식당 여주인은 반년 전부터 식당에 들리던 따이공이 눈자리 나게 줄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식당에 늘 비는 식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하루에 스물이 넘었는데요, 지금은 일여덟밖에 안돼요.”

     대륙과 반도에 갑자기 찬 기운이 불어치는 듯 했다. 인적, 물적 내왕이 급격히 줄어들고 이에 따라 그 ‘마을’도 바다에 얼어붙고 있었다. 페리는 개통된 약 30년 만에 보기 드문 난국의 상태에 처하고 있었다.

     손건군 씨는 인터뷰 도중에 내일이라도 불편하고 힘든 현 상황에 변화가 있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이 운항편이 없었더라면 위해의 개혁과 개방이 있을 수 없었지요. 지금의 상황은 위해의 이 운항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근심이 첩첩합니다.”

     대륙과 반도의 냉각된 바다에 페리가 또 한 번 물꼬를 틀 수 없을까…

     그날 바닷가를 지나는데 닻을 내린 어선이 온 해만을 뒤덮고 있었다. 뒷이야기지만, 북위 35도 이북의 위해 해역에서 얼마 전의 5월 1일부터 어로 금지조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로작업은 미구에 다시 시작된다고 했다.

-두 번째 이야기-


연태의 ‘신라방’을 만드는 그 촌장의 이야기

     30년 전의 그의 첫 연태(煙台) 행은 일장 ‘무용담’처럼 들리고 있었다.

   “먼저 한국의 관련 부처에 신고를 해야 했는데요, 한국 3급 공무원 3명의 보증을 받아야 중국 출입허가가 떨어졌습니다.”

      3급 공무원이라면 중국에서는 시장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1988년 그때는 중국 출국 수속절차가 그처럼 ‘별 따기’로 힘들고 번잡했다. 중국과 한국은 아직 국교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박세동은 그가 산동성(山東省) 연태에 발을 들여놓은 첫

한국인이라고 자랑한다. 실제로 그는 공식적으로 연태의 최초를 기록한 인물로 되고 있다. 그는 연태시 제 1호 영예시민의 칭호를 받은 한국인이다.

     그때까지 연태는 어촌처럼 시골의 작은 도시였다. 저녁이면 불빛이 적었고 네온사인이 없었다. 한국과 해상으로 약100 해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륙 남쪽의 홍콩을 경유하여 상해를 지나 비행기와 기차로 수천 ㎞를 우회해야 했다. 가깝고도 먼 이 연태는 박세동에게 그 이름처럼 모두 낯선 이역의 고장으로 되고 있었다.

     사실상 연태라는 이 지명은 일찍 명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홍무(洪武) 31년(1398) 왜구의 침노를 막기 위해 바닷가의 북산에 ‘봉화대’를 만들었다. 봉화 대에는 늘 왜구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연태’라는 이름은 그때 그렇게 생겼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바닷길은 실은 해적이 아니라 동서방의 무역상이 오가던 ‘해상 실크로드’였다. 수․당(隋․唐) 시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교역망(交易 罔)이 형성되어 신라인들은 천년 전의 동아시아의 국제교역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그때 반도에서 많은 신라인들이 바다를 건너 중국의 산동과 강소(江蘇), 복건( 福建)의 연해 일대에 족적을 남겼으며 또 그곳에 그들의 교민 집거지(集居地)를 만들었다. 이렇게 농촌

에서 형성된 집거지를 ‘신라촌(新羅村)’이라고 하고 도시에 형성된 집거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한다.

      미구에 박세동은 유아용품 브랜드인 ‘아가방’의 회사 법인대표로 연태시에 정착했다. 연태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으로는 그가 단연 선두의 위치에 서고 있었다. “(저희가) 사업하는 환경으로는 연태가 참으로 좋은 위치입니다. 인력보충 여건도 충분했고 인건비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충분한 가격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중국과 한국 양국 국교가 정상화되고 해상 통로에 이어 공중통로가 하나둘씩 열렸다. 이 과정에 박세동은 연태시 정부와 한국 교통 관련부처를 연결해주고 협상을 주 선하는 오작교 역할에 나섰다고 한다. 오늘날 연태에서 한국으로 왕복하는 선박은 매주 연 13회에 달하며 항공편은 매주 연 124회에 달한다.

     한국 기업은 1990년부터 연태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다고 박세동이 회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즈음하여 연태에 상주하는 한국인은 최고 6 만명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LG, 포항 등 한국 세계 500강 그룹은 물론 중소기업 투자자들도 연태투자에 나섰다. 한국

은 연태의 제1대 무역 파트너이자 제1대 외자 내원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와중에 1997년의 ‘금융풍파’, 2008년을 즈음한 산업 재편성 등으로 연태의 한국기업이 일부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인들도 점진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 다.

     “지금은 (연태의) 한국기업이 성숙기에 들어서지 않았을지 하고 생각합니다.”

     박세동은 연태의 한국기업과 한국인의 현황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었다.

     오히려 일부 한국 대기업도 연태에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대량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존의 업체들이 물러나는 대신 신진기업이 새로 들어서고 있다. 중한 양 국의 내왕과 거래가 자주 필요한 경우 연태 등 산동 연해지역은 여전히 최적의 선택지로 된다는 것이다.

     현재 연태에 상주하는 한국인들은 약 1만 5천 명 정도로 추산, 이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연태 시내의 일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집중, 집거하고 있다. 그들은 내산구 (萊山區) 황해도시화원(黃海城市花園)과 개발구의 벽해운천(碧海雲天) 등 아파트단지에 집거한다. 연태에 말 그대로 현대판 ‘신라방’을 웅기중기 형성하고 있는 것.

     한때 연태의 한국인들이 급증하면서 가족들이 동반한 기업인, 주재원 2세의 교육문제가 난제로 대두했다. 2000년, 당시 연태한인상공회 회장으로 있던 박세동은 연태 시 정부에 한국학교의 설립을 신청했다. 나중에 연태시 정부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도시 중심지역의 땅을 무료 임대하고 학교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중국 국내에 네 번째로 설립한 한국인학교인데요, 학교를 설립한 이 점을 저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세동은 제일 인상이 깊은 부분으로 연태의 한국인학교 설립을 거듭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금액은 당시 연태 시중의 가격으로 15채의 집을 살 수 있는 가격의 인민폐 240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태 한국인학교는 한국에서 70여명의 교원을 모집하고 한국 교육시스템을 옮겨와 초, 중, 고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연태의 한국인들은 연태시 정부의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다른 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박세동은 자칫 현지인으로 착각하리만치 연태에 친숙했고 연태를 사랑하고 있었다.

     “여기(연태)는 공기도 좋고 인심이 좋습니다. 저는 주변의 분들에게 사업하려면 연태로 오라고 권합니다.”

     2012년 5월, 중한 FTA협상이 시작되면서 연태시는 중한(연태)산업원을 건설할 데 관한 구상을 제기했다. 이 구상은 국가와 성(省)급의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한국과 의 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다. 2016년까지 신규 한국투자프로젝트가 87개, 계약을 체결한 금액이 인민폐 31억 3천만 원에 달했다.

     연태시 산업구조의 재편은 일찍부터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박세동이 말한다. 2008년을 계기로 중국에서 인건비가 점진적으로 상승되었고,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대량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업체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단순노동을 필요로 하던 의류, 1차 전자제품 등 산업이 동남아 등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다.

     “우리 여기(연태)에서 경쟁력이 있는 사업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의료나 미용, 건강 같은 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추진할 생각입니다.”

     얼마 전 박세동은 중국과 한국 양국 협력기업을 연결해주고 스타트기업을 지원해주는 플랫폼 ‘연태한국기업지원센터’를 설립하였다.

     최근 한국과의 협력에서 생물제약, 새로운 에너지, 스마트제조를 대표로 하는 전략적 신흥산업과 건강서비스, 문화창의를 대표로 하는 현대서비스업이 두각을 나타내 고 있다. 박세동은 그의 지원센터가 연태에 진출하려는 한국기업을 지원하여 가장 적합한 중국 현지기업을 연결해주게 된다고 밝혔다.

     “우리 센터는 또 양측의 신뢰를 담보하고 협력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화해를 주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박세동은 연태에 온지 어언 30년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중국통’이라고 불리고 있단다. ‘한국기업지원센터’는 종국적으로 박세동의 그런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 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을 전면 지원하며 양국 기업의 깊은 교류와 합작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지난 7월에 오픈된 센터는 1층

과2층으로 나뉘어져 1층은의료, 보건, 미용분야의 특정화된 사업공간으로, 2층은 한국의 스타트 기업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게 된다.

     “한국의 작은 스타트 기업에는 이런 공간이 꼭 필요해요. 이런 공간에서 서로 정보도 주고… (그렇게) 나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관련 부분을 조언해 주고 교육해 주는 것도 상당한 보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기업지원센터’는 아직은 대부분 비어있었지만 인제 9월부터 곧 입주하게 된다. 일부 교육프로그램은 이미 시작된 상태이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사진에 담은 건물 외곽은 특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건물 상단에는 ‘연태한국기업지원센터’라는 한자(漢字) 간판이 씌어 있었고 건물 양옆에는 외곽으로 뻗은 기둥이 힘차게 세워졌는데, 정면으로 돌출한 반월형의 건물은 마치 누군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환영, 품으로 마중하는 듯 했다.

     옛날의 ‘신라방’은 한국기업의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었고, 박세동도 그 현대판 ‘신라방’의 관리자인 ‘촌장’ 자체로 거듭나고 있었다. ‘동방 해상 실크 로도’의 기착지 연태에서 ‘신라방’의 이야기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바다 건너 그곳의 ‘수광’을 찾아온 ‘도래인’

     “수광(壽光)이라고 하면 눈앞에 대뜸 떠오르는 게 무엇이죠?”

     시내에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첫 이야기이다. 목숨 수(壽)와 빛의 광(光) 조합, 칠색의 무지개는 나름대로 많은 그림을 만든다.

     수광의 이 이야기는 천년의 세월을 엮고 있었다. 기원전의 동주(東周, B.D.770~B.D.256) 시기에 벌써 생긴 지명이라고 전한다. 제(齊)나라 때 여구(閭邱)라고 불리는 웬 촌로가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다. 그는 국왕을 만나자 태양의 빛 같은 은혜를 갈구했다고 한다. 품성이 단정한 관리를 임용하여 좋은 법령을 제정하면 순박한 민풍을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장수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 수광이라는 지명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미구에 수광현이 유방(濰坊) 나아가 산동성(山東省)의 밖까지 이름을 날린 것은 결코 이 촌로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이 최고로 꼽혀요. 제일 큰 시장도 생겼습니다.” 이재범은 그가 수광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이재범은 바다 건너 대륙에 공장을 세운 한국인이다. 일명 ‘도래인(渡來人)’이다. 그가 특별히 수광에 눈길을 돌린 것은 지명 보다 ‘채소’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광의 채소재배기술은 중국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마침 이재범이 유방을 찾던 그 무렵인 2000년부터 ‘채소박람회’ 즉 중국채소기술박람회가 해마다 수광에서 열리고 있었다.

     기실 이재범이 대륙에 첫 발자국은 디딘 곳은 아직 수광과 약 200리나 떨어진 연해의 청도(靑島)였다. 중한 수교가 이뤄지기 전의 1991년경이었다.

     “제가 청도에 도착한 그날이 4월 10일이었습니다. 그해 결혼을 하고 첫 자식을 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때 이재범은 지인이 청도에 공장을 만들면서 청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은 청도 어디나 한글 간판이 보이고 있지만, 이재범이 발을 들여놓던 그때는 온 청도에 한국회사가 3개뿐이었다고 한다.

     와중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1992년 9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 국빈방문 일정에 청도의 한국공장 방문을 넣었다. 그래서 미리 전에 안전요원들이 청도의 한국공장에 주재했다고 한다.

     "요원들은 우리 공장의 하수도 시설까지 낱낱이 검사를 하는 겁니다."

     이재범은 그때 그 일을 어제처럼 눈앞에 선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안전문제로 대통령의 방문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때 대통령의 전세기가 청도에 내리지 않았고, 직항기도 오랜 훗날까지 청도에 열리지 않았다. 이재범은 비행기 직항이 열린 그해가 1994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청도에 오려면 김포에서 상해, 다시 청도로 환승을 해야 했다. 번거롭고 시간이 걸렸다. 말이 비행기편이지 어떤 경우에는 1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인천에서 위해까지 페리로 십여 시간 걸렸는데요. 오히려 비행기보다 배가 더 편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이 ‘도래인’은 이름 그대로 하늘이 아니라 바다를 배로 건너고 있는 셈이었다.

     청도를 비롯하여 산동 지역은 실은 옛날부터 조선반도의 선민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었다. 산동지역은 조선반도에서 중국 대륙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한 선착지였다. 연해에서 시작된 육상 ‘실크로드’에는 다시 조선반도 선민들의 족적이 찍혔다. 일찍 당(唐)나라 때 하남도(河南道)를 망라한 등주(登州), 내주(箂州), 밀주(密州), 청주(靑州) 등과 하북도(河北道)의 체주(棣州), 덕주(德州), 박주(博州) 등 여러 곳에 신라의 교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기록한다. 이 책은 일본의 고승 원인(園仁, 793~864)이 대륙에 구법을 다녀가면서 적은 여행기이다.

     2000년, 이재범이 위방에 공장을 세울 때 벌써 3,4개의 한국기업이 현지에 나타나고 있었다. 연해에 상륙한 한국의 ‘도래인’들은 뒤미처 연해에서 내륙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범이 나중에 수광현에서 선택한 업종은 농업용 하우스 비닐박막이었다. 중국에서 약 10년간 고무제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비닐박막 제품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수광은 중국에서 최고급의 농업용 하우스비닐에서 품질이 제일 좋은 제품을 사용합니다. ‘범을 잡으려면 법의 굴에 들어가야 하지요.’

     청도나 연태, 위해와 같은 곳이 아닌 수광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규모 투자와 생산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결국 사용자의 충분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재범은 먼저 주변 농민들에게 그의 산동자강(自康)비닐박막유한회사의 농업용 비닐박막을 널리 돌려 시범 사용하도록 하였다. 2년 동안 시장수요를 파악한 뒤 투자 규모를 크게 늘려 공장을 건설하고 본격적으로 비닐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자강회사는 중국 전국의 농촌에 널리 브랜드를 알린 회사가 되었다. 전국 어느 지역에서든지 ‘산동자강’하면 비싼 비닐박막을 만드는 회사, 그렇지만 좋은 비닐박막을 만드는 회사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 이재범의 자신만만한 이야기이다.

     “EVA필림(비닐박막) 업체 중에서는 전국적으로 산동자강이라고 하면 70%-80%의 농민은 저희 회사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영원토록 장수하는 천국의 기업은 없다. 2008년 북경올림픽을 시점으로 중국에서 산업구조 조정이 실시되고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많은 기업이 도태의 국면에 직면했다. 중한 수교 초기 완구와 봉제,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상대적으로 집중했던 한국기업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때는 한국 기업들이 거의 다 직원을 몇 천 명씩 썼지요. 인건비가 많이 상승하면서 그런 기업들은 베트남 같은 인건비가 낮은 나라로 이전했습니다.”

     연태한인상공회의 회장 김종환도 이재범의 견해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재범처럼 중한 수교 이전부터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발전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고 있었다. 그와 같은 ‘도래인’들은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대와 더불어 재빨리 적응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

     “기업의 흐름이 그러다 보니까 우리 교민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맞춰서 2008년까지 계속 증가했으나… 그 이후로 점차 줄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줄지도 않고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종환은 현재 연태에 노동집약적인 산업보다는 대기업이나 고부가가치를 살릴수 있거나 기술경쟁력을 보유한 기업들이 많다고 밝힌다. 앞으로도 고부가가치를 창출할수 있는 기업들이 연태로 많이 들어 올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

     실제 수광이 소속한 유방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1948년, 유현(濰縣)을 중심으로 남쪽의 탄광도시 방자(坊子)를 합친 지역의 이름. 이 신도시의 이름에 걸맞게 한국 보원케미컬도 새로운 산업 즉 신규에너지재료로 진출하고 있었다.

     보원케미컬의 과장 김경동은 회사의 지속적인 발전 계획을 펼치고 있었다. “현재 협력업체의 공장건물을 잠시 임대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부근에 공장건물을 매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방 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83개로 가구와 완구 등 여러 업종을 망라하고 있다. 김경동은 개발구에서 시내에 나가면 늘 귀에 익은 한국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 그들뿐만 아니다. 유방의 외자기업은 한국은 물론 기타 나라와 지역의 904개가 2016년말 현재 상무국에 등록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수광’ 이야기를 엮는 사람들은 더는 옛 마을의 옛 사람뿐만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대열에는 또 바다를 건넌 그 ‘도래인’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 째 이야기-

동방의 ‘실크로드’에 있었던 옛 외국인 여인숙

     그때 그 시절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교동(膠東)반도의 제일 큰 사찰이었다. 조선반도와 일본에서 대륙으로 구법의 길에 올랐던 승려들이 늘 이 사찰에 숙박했다. 이에 따라 적산법화원은 산동(山東) 나아가 해외에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남쪽에는 암석으로 된 산마루가 있고, 정원에는 맑은 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서남쪽과 북쪽은 이어지는 산봉우리가 병풍을 이루고 동쪽은 멀리 바다가 바라보인다.”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 793~864)이 그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한 ‘적산법화원’의 한 장면이다. 그때 엔닌은 전후 2년 9개월 동안 ‘적산법화원’에 객거(客居)했다.《입당구법순례행기》는 현장(玄藏)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마르크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의 하나로 불린다.

     적산은 산동성(山東省) 영성시(榮成市)의 석도(石島)에 위치, 바위가 붉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른 이곳에는 진한(秦漢) 이래의 역사유적을 늘 만날 수 있다. 바위마다 이야기가 있고 산마다 이야기가 있다.

     적산의 사찰 법화원에도 이야기가 있다. 적산법화원은 특별히 신라인들의 불사(佛事)를 위해 만든 신라사찰이다. 사찰을 세운 사람은 신라인 장보고(張保皐, ?~846)라고 엔닌이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의 무장이자 무역상으로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인물이다.

적산풍경구에는 장보고를 기리기 위한 전시관이 특별히 설치되어 있다고 가이드 유씨가 말한다.

     “‘장보고전시관’은 지금 한국 청소년들이 해외에서 수학하고 외국인이 적산을 관광하는 주요한 목적지로 되고 있습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 따르면 법화원에서 경문(經文)을 강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모두 신라인이었으며 또 경문을 말하는 사람은 신라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찰을 세울 때 독경을 하기 위해 청한 첫 승려들이 천태종파(天台宗派)로 《법화경》을 독송했기 때문에 사찰의 이름을 ‘적산법화원’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매년 한가위(음력 8월 15일)에는 신라인들이 사원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명절을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한때 적산법화원은 신라인이 당나라를 오가는 역참과 문화 활동의 중심으로 되었다.

     옛날 신라사찰의 부근에는 통상 신라인들이 마을을 이뤄 살고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적산법화사가 위치한 산동반도 일대에만 해도 모평(牟平)의 도촌(陶村)과 소촌포(邵村浦), 유산포(乳山浦), 문등(文登)의 적산촌(赤山村), 유촌(劉村), 내주(箂州)의 남승가촌(南升家村)에 모두 신라인들이 집거, 신라촌(新羅村)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산법화원이 위치한 옛 적산촌은 현재 적산풍경구로 거듭나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의 적산법화원은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건, 1990년에 개관했다.

     적산 정상에 위치한 거대한 적산명신(赤山明神)은 바다의 신인데, 일부에서는 바로 해신(海神) 장보고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가이드 유씨는 적산명신은 세계 제일의 해신상(海神像)이라고 자랑했다.

     “적산명신은 세계적으로 제일 큰 동산인데요, 높이가 58.8미터나 됩니다. 또 중국에서 평안함을 기리는 제일의 신상(神像)입니다.”

     적산 풍경구에는 날마다 한국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 관광객은 거의 날마다 1천명에 달했다. 어떤 경우 적산풍경구를 찾는 국외인이 오히려 국내인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해마다 관광객은 연 60만 명에 이르는 등 태산(泰山)과 곡부(曲府)와 더불어 산동 관광의 목적지로 되고 있었다.

     유씨 같은 가이드가 적산풍경구에 몇 십 명이나 된다고 말한다. 한국 관광객은 주로 위해에 기착하는 페리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바닷길을 통해 적산풍경구에 이르고 있었다.

     기실 천 년 전에 당나라로 구법을 떠난 엔닌도 이처럼 바닷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옛 신라인이 다니던 이 바닷길은 신라인이 다니던 해상에 ‘실크로드’였다. 이 ‘실크로드’는 육지와 가까워서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또 견당사(遣唐使)나 상선(商船)에 탑승하여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당사에는 신라인 통역이 동승하고 있었다. 엔닌은 또 적산법화원 주지와 신라인들의 증명서류를 받아 등주(登州)에 가서 문첩(文牒, 지금의 여권)을 취득한 후 계속 서행했다. 그 시점이 840년 봄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5년 후 엔닌이 오대산과 장안을 경유하여 재차 등주에 도착했을 때 적산법화원은 “승려가 드물고 사찰을 훼손했으며 경문과 불상을 훼손했다.” 당나라 무종(武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불교를 폐지하고 불사를 훼손했던 것이다. 엔닌이 부득불 일본으로 귀국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엔닌은 당나라 문종文宗 개성(開成) 3년(838)에 바다를 건너 양주(揚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불법을 배웠다. 이듬해인 839년 3월 20일, 엔닌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고용한 신라인 수부(水夫)가 양주와 일본에 이르는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아서 밀주(密州)에서 일본으로 통하는 항로를 선택했다. 밀주는 지금의 산동성 제성(諸城)을 말한다. 일행은 도중에 큰 바람을 만나 문등에 상륙하였으며 이에 따라 적산법화원에 가서 계속 구법하게 되었던 것, 신라인들이 도움을 받아 종국적으로 오대산으로 향한 것은 바로 이 법화원 행각으로 이어진 일이다. 적산법화원은 해운과 상업무역을 진행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연락 거점이었다. 또 이 거점은 상인과 구법승들이 다니는 육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되고 있었다.

     엔닌은 미구에 적산법화사를 떠나 다시 내지로 향발했다. 이때 그는 유방(濰坊)의 청주(靑州) 용흥사(龍興寺)에 들리던 과정을 적고 있다. 용흥사는 그가 처음 들렸던 개원사와 더불어 당나라 때의 유명한 사찰이다.

     엔닌 일행이 일부러 청주에 들린 것은 무엇보다 관가의 문첩을 받기 위해서라고 청주박물관 왕서하(王瑞霞) 부관장이 밝힌다.

     “청주는 당나라 때 정부 아래의 행정기구였지요, 산동 지역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문(衙門)에 통과되어 문첩을 받으려면 청주에 와야 했습니다.”

     청주는 당나라 때 등주 일대에 상륙한 후 내륙으로 통하는 경유지였다. 당나라 조정은 청주에 이른바 ‘상서 압량반사 아문(尙書押兩藩使衙門)’ 즉 약칭 ‘압신라발해양반사(押新羅渤海兩藩使)‘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조정이 산동에 발해와 신라, 일본의 접대를 담당한 기구였다. 이 기구는 공문 검사와 상주를 즉 조정에 대한 보고를 책임지고 있었다.

     외국 사절과 승려, 상인은 현지에 이른 후 주와 현 관아에서 발급한 문첩을 소지해야 통행할 수 있었다. 다른 현으로 가려면 문첩을 바꾸고 그 현의 공문을 받아야 관아의 보호와 세속적인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사찰이나 여인숙은 사사로이 외국인을 유숙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문첩은 엔닌 일행의 오대산(五臺山)의 순례에 꼭 필요한 증명서류였다.

     개성 5년(840) 3월 21일, 엔닌은 마침내 청주에 도착했다. 이날 엔닌 일행은 구미점(韭味店)의 장씨집에 숙박, 이튿날인 22일 청주 시내에 도착하여 용흥사의 신라원(新羅院)에 입주한다. 신라원은 주로 신라인을 접대하기 위한 숙박소였다. 신라원은 신라관(新羅館)처럼 육상 ‘실크로드’의 역참운수 계통에서 한 고리로 되고 있었다.

     참고로 당나라 정부는 외국 사절단을 위해 여러 지역에 관사를 따로 마련했다. 등주는 당나라 정부가 신라와 발해 사절단에 규정한 입국 항구였으며, 따라서 등주에는 특별히 그들을 상대한 관가가 있었던 것이다. 등주 성남(城南) 거리의 신라관과 발해관은 바로 신라인과 발해인을 상대한 관사의 이름이었다.

     청주 용흥사에는 신라원을 제외하고 또 와불원(臥佛院), 천궁원(天宮院) 등 일여덟의 별원이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와 금나라가 지핀 전쟁이 붉길이 고찰에 옮겨 붙으면서 사찰은 황패하게 되었고, 명나라 초, 청주 관가에서 번왕(蕃王)의 저택을 늘려지으면서 사찰 옛터는 소실되었다.

     왕서하 부관장은 용흥사이 청주에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용흥사의 유적은 구체적인 위치와

범위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요. (1996년) 운동장을 만들면서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용흥사는 동방의 명찰(名刹)로서 그때 6천 명 승려가 있었다. 사찰에는 또 5,6세기의 북위(北魏), 북제(北齊)부터 수․당(隋․唐) 시기에 이르는 정교한 불상이 있었다. 현재 용흥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청주박물관 특별전시되고 있다.

     엔닌이 용흥사에 이른 후 용흥사의 승려가 그를 대신하여 수속을 밟았다. 엔닌의 일기에 따르면 청주 아문(衙門)은 엔닌 일행에게 수속을 마친 후 또 천 3필, 차 여섯 근을 하사했다고 한다. 청주 관가의 하사품은 특례가 아니었다. 《불조통기(佛祖統記)》에 따르면 정관(貞觀) 8년(634)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산동반도 내주(箂州)의 상주문을 받는다. 그 내용인즉 고려 삼국(고구려, 신라, 백제)의 승려가 중국에 와서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데, 그 허실이 뭔지 관망하고자 한다는 것. 이에 이세민은 그들을 막는 건 국익에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인정하고 고려 삼국 구법승들의 진입을 허락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때부터 당나라는 반도 구법승들에게 수용정책을 취하며 또 “번승(蕃僧)이라면 해마다 비단 25필을 주며 사계절 계절에 따른 복장을 주라”는 규정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엔닌은 그들이 구법 여로에서 당나라 지방 주와 현 정부가 시사(施舍)한 쌀과 밀가루 등 생필품을 받았다고 여행기에 기록하고 있다. 엔닌 일행은 위해의 문등현과 등주에서 서행할 때 역시 이 지역의 역참운수 계통을 이용했으며 신라원을 포함하여 선후로 초현관(招賢館), 사산관(斜山館) 등 관사에 숙박했다. 당나라 때 역참은 30리마다 하나가 있었다고 법전 《당육전(당육전)》이 기록하고 있다. 일부 관사는 교통도구는 제공하지 않고 관원과 관가의 손님만 초대했다. 여인숙은 대부분 개인이 경영하고 내왕하는 길손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했다.

     엔닌 일행은 이어 치주(淄州), 제(齊州), 덕주(德州), 패주(沛州), 당주(唐州), 기주(冀州), 조주(趙州), 진주(鎭州)를 경유, 2,990리를 거쳐 마침내 오대산에 도착한다.

     오늘날 옛 ‘실크로드’에는 역마(役馬)가 아닌 고속철이 달린다. 우리 일행은 적산의 법화원을 떠나 반나절에 청주의 용흥사에 도착하고 있었다. 새로 발굴, 재현된 옛 사찰에는 향불의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범패(梵唄)의 음악이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 년 전 대륙과 반도를 오가던 승려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금세라도 옛 ‘실크로드’의 ‘일대일로’에 다시 떠오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