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에 "탈"이라는 어휘가 있다. <새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탈을 (1) 종이 나무 흙 따위로 만든 얼굴의 모양으로, 원시 사회의 종교적 呪術에서 기원하여 뒤에는 무용 연극 등에 사용된 가면 (2) 얼굴을 감추기 위하여 뒤집어 쓰는 가장물의 한가지 (3)속 뜻을 감추고 겉으로 거짓을 꾸미는 매우 의뭉스러운 얼굴, 예: 애국자의 탈을 쓴 모리배 등으로 그 뜻을 해석하였다.

사전에서의 해석은 한결같이 한자어의 假面具에 해당하는 풀이이다. 한국 대표적인 사전인 <새우리말 큰 사전>의 풀이가 정확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고유 한국어인 <탈>의 어원은 보다 깊은 민족 문화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한국 남방 방문길에 터득하게 되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한국의 장마철이다. 초여름의 쭈룩쭈룩 내리는 장마비를 맞으며 기자가 찾은 곳은 한국 최남단 탈의 고장인 경상남도 固城의 갈촌이다.

일행이 우선 들린 곳은 갈촌 탈 박물관이다.

턱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흰 머리를 땋아 올린 이도열 관장님의 첫 만남 부터가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다. 그의 안내로 그와 그의 제자들이 손수 만들어낸 갖가지 탈을 감상하며 소개 말씀을 듣노라니 유구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다.

간단한 인사 말씀과 함께 청산 유수처럼 이어지는 오도열 관장님이 말씀이 심심산속의 개울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느낌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터 누구나가 탈을 갖고 있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아, 그러니깐 사람마다 다 자기 탈이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의 탈은 무엇일까?…사색의 실마리를 굴리는데 이도열 관장님의 말씀이 계속된다.

"속탈, 배탈, 허리탈… " 얼핏 들어도 여기서 탈의 원뜻은 한자로 假面具가 아니라 탈(病) 즉 신체 어느 부위의 毛病으로 안겨 온다. 바로 그것이다. "독은 독으로 친다."는 옛날 성구의 풀이 그대로 의학이 오늘 처럼 발달되지 않았던 먼 옛날 한민족이 탈(毛病)을 이겨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 탈(假面具)이다. 정말 머리에 쑥 들어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탈(毛病)은 <새우리말 큰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는 새로운 해석이다. 하지만 반만년 역사의 조선 반도 단일민족의 종교 사상과 지혜를 엿보게 하는 새로운 어휘 풀이이다.

이도열 관장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탈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보는 얼굴에 쓰는 탈이 손자라면 옛날 마을 어귀마다 세워 두었던 장승탈은 그 아버지에 속하고 그보다 먼저 고인돌 선돌 등 돌로 된 탈은 그 할아버지에 속한다고 할까요?"

그는 탈도 사전처럼 풀이책이 나와야 한다면서 오행설로 풀면 다섯개의 얼굴이 되고 1년 열두달로 풀면 12개 얼굴이, 1년 365일로 풀면 365개의 서로 다른 얼굴과 성격이 각각 나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탈도 각양 각색이라는 말이리라.

한국에서의 탈은 보는 이의 마음 가짐에 따라 그 형태와 내함(內函)도 천태만상을 이루는 일종의 신앙이며 예술이다.

탈(假面具)로 탈(毛病)을 고친다는 것은 정말 한민족이 고안해낸 지혜이다. 더러워진 물은 깨끗한 물로 씻어 내고 흐트러진 정신은 맑은 정신으로 가다듬고…정말 탈의 內函은 무궁하다.

삶의 터전인 마을의 액과 탈을 막기 위해서 대대로 이어져온 탈문화 그중에서도 장승은 마을을 수호하고 주민의 안녕을 염원하여 세웠던 이 땅의 지킴이라고 설명하는 이도열 선생…그는 탈문화를 확산 보존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탈축제, 탈만들기,장승춤, 장승 그리기 등 다양한 행사도 벌써 수십차례 진행해 왔고 일본,독일, 스위스, 벨기에 등 나라들에서 장승 세미나를 조직하여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현재 위치한 갈촌 탈박물과 뒷쪽 산언덕에 3층 짜리 건물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새로 건립되는 탈학교와 박물관이다.

이번 투어에 참가한 20여개국 60여명 외교 사절들과 외신기자들은 건설중인 새청사 현장에서 이도열 선생과 그 제자들의 안내하에 장승을 깎고 탈을 그리는 체험으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선생도 이제 건설중인 청사에 이처럼 많은 외국인들이 체험장으로 이용하여 보다 흥성일 내일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라고 기쁨을 금치 못했다.

한민족 문화 유산인 탈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이도열 선생은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현재 장승 학교를 건립하고 교장으로 사업하며 손수 민족유산인 탈을 길이 전해 내려 갈 인재들을 키워내고 있다. 학과는 1년코스와 3개월 3일 코스 등으로 나뉘는데 1년 코스에서는 탈 예술인을 키워내고 3개월 코스를 나오면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 할 수 있고 3일코스는 내외국인 상대로 전통문화의 체험장으로 되는 것이다. 매달 학비도 20만원씩 되는 만만찮은 수자지만 장승학교는 현재 전국 각지들에서 모여 온 학생들이 장기 혹은 단기 공부로 흥성이고 있다. 그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한국인들은 전통문화와 유산에 깊은 관심과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한국에는 탈의 고장으로 갈촌외에도 하회마을이 있다. 역사와 전통이 더 오래된 갈촌탈을 신앙탈이라면 하회 마을의 탈은 예능탈이라고 할 수가 있다고 이 도열 관장님은 소개한다.

신앙탈이든 예능탈이든 민족의 유산은 반드시 그 맥을 잇고 흥성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도열 선생의 말씀이 나의 가슴에 와 닿는다.

한 여성 아나운서의 시낭송을 멀리하며 우리는 한국 신앙탈의 본 고장 갈촌을 떠났다.

탈 많은 세상을

탈 없이 살아 가기를

먼 먼 날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부터

우리들의 희로애락을 대변하고

온갖 까탈을 다스려 온 장승에게

이 한몸 오롯이 의탁하고 싶습니다.

그 장승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삶의 진솔한 이야기와

춤과 노래의 한마당 장승제가 있는곳

여기 남해의 눈부신 태양이 있는 곳에서

부디 내탈 네탈들을 툴 툴 털어 보리고

한판 춤을 추어 봅시다

탈없는 우리들의 세상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