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지구(喪家之狗)
◎글자풀이: 초상 상(喪), 집 가(家), 어조사 지(之), 개 구(狗)
◎뜻풀이: '상갓집 개'라는 말로서 의탁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 또는 그런 신세를 비겨 이른다.
◎유래:
춘추전국시대 말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정공(定公) 때 대사구(大司寇:지금의 법무부 장관)를 맡았지만 왕족 삼환(三桓)에게 배척 당해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공자는 십수 년 동안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녔지만 어떤 군주도 그의 정치이념을 받아주지 않았다. 갖은 수모와 고난을 겪은 공자가 위나라에 도착하여 군주 영공(靈公)을 만났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공자를 옆에 두고 싶었던 영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
"선생께서는 노나라에서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공자가 "노나라에서는 곡식 육만(약 2천 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위나라도 공자에게 곡식 6만을 주었다.
그러나 위나라의 다른 대신들의 질투와 감시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공자는 못 견디고 10개월 만에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향하던 중 송나라의 광(匡: 오늘날 하남성 장원현 지역)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광 지역은 일찍 노나라 귀족 계씨(季氏)네 가신(家臣)이었던 양호(陽虎)가 주군을 배신하고 3년 동안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곳이다. 그곳에는 아직도 양호가 침입 당시 허물어진 벽과 잔해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말을 부리고 있던 한 제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채찍으로 성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난번 왔을 때는 바로 저기 무너진 곳을 통과하여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광 주민이 이 말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공자는 양호와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 노나라 계씨의 양호가 사람을 시켜 약탈을 감행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주민들이 공자를 둘러쌌다. 한참 실랑이질 끝에 공자는 잡혀 구금되었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공자가 갇힌 지 닷새째가 되어서야 수제자인 안회(顔回)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안회를 본 공자가 반가운 나머지 소리쳤다.
"오, 살아있었구나! 무척 걱정했단다."
안회가 대답했다. "스승님이 살아계신데 제가 어찌 먼저 죽겠습니까?"
공자가 좀처럼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자들의 걱정이 커져갔다. 공자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주나라 문왕이 죽고 난뒤 주나라의 문화 유산이 내 손에 있지 않으냐? 그러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이를 계승하라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 하늘의 뜻이 있는 한 광 사람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얼마 뒤 광 사람들도 전후사정을 알고는 공자를 풀어주었다.
정(鄭)나라에 도착했을 때였다. 공자는 또 한번 제자들과 서로 엇갈리면서 도성문 밖에 홀로 외로이 서있게 되었다. 정나라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문 밖에 누군가 서 있는데 이마가 요 임금과 같고 목은 순•우 임금 때의 명 재상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 춘추시대 정나라 정치가)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밑으로는 우 임금보다 세 치나 짧았고 그 초췌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와 같았소."라고 설명해주었다.
자공은 스승임을 알아차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공자에게 들려주니 공자는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외모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상가지구(喪家之狗:상갓집 개)와 같다는 말은 맞았을 것이다."
상가지구는 초상집에서 주인이 돌보지 않아 굶주려 수척해진 개를 말한다. 오랫동안 천하를 주유하면서 정치적으로 실의에 빠졌던 공자의 모습은 말 그대로 볼품없고 처량한 모습이었을 것이고 이 모습을 본 사람이 공자를 상가지구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처지가 보기에 딱하고 불쌍함을 이르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가 있다. 상가지구란 사방으로 떠돌며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나 또는 그런 신세를 비겨 이르는 말로서 매우 상심하고 낙심하는 사람의 모양을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