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8 08:56:46 | cri |
(노을비낀 곤명호 )
베이징의 관광지 가운데는 손꼽히는 경관인 이화원도 있다.
이화원의 모든 풍경이 다 그러하지만 이곳의 저녁노을은 남다른 정서를 자아낸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흘러간 력사속에 묻혀있는 이화원의 비화들이 붉게 타는 노을속에 실려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화원을 찾은김에 저녁노을까지 사진에 담아보기로 하였다.
노을이 비끼기까지 아직 시간이 퍼그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이화원의 여러곳을 돌아보기로 하였다.한낮이 퍽 지난 때인데도 이화원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였다.
(이화원 인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아직도 줄을 서야 입장할수 있는 형편이다.
중국인들의 관광열기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것을 여기서도 깊이 느낄수 있었다.
중국 베이징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이화원은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이자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으로써 총면적이 2.97평방키로메터에 이르며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다.
이화원 가운데서 이채를 띠는것은 곤명호라고 부르는 호수이다.
(곤명호에서 기념사진 )
곤명호는 2.2평방키로메터를 차지하며, 사람들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인공 호수라고 한다. 곤명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만수산은 곤명호를 파낼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이다.
이화원의 건축물들은 모두 만수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줄느런히 늘어서 있다.
산 꼭대기에 있는 불당 지혜해는 드넓은 곤명호를 비롯한 이화원 전체를 부감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아래 21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6각형의 불전, 불향각은 이화원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꼽힌다. 이외에도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인수전, 홀로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덕화원,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배운전 등이 유명하다. 생활거주 구역은 서태후가 생활한 락수당(乐寿堂), 광서제와 그의 황후가 생활한 옥란당(玉澜堂), 그리고 황제의 첩들이 생활한 의예관(宜藝館) 3개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개의 건물은 지붕이 있는 복도로 서로 연결되여 있는데 락수당 앞에는 황실 가족들이 호수를 통해 오갈수 있도록 만든 나무 선착장이 있다.
생활거주 구역의 건물들은 서쪽으로 728m의 긴 복도인 장랑으로 이어져 있는데 장랑의 벽과 천정에는 10,000여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수호전 ,삼국연의를 비롯한 중국고전소설의 명장면들을 볼수 있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복도 중간중간에는 사계절을 의미하는 류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淸遙)라는 4개의 정자가 있다.
(장랑)
서태후가 산보할 때 애용했다는 장랑에 지금은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오가거나 걸터 앉아서 이화원의 경치를 한껏 향유하고 있다.
이화원의 나머지 지역은 만수산과 곤명호를 중심으로 하는 관광구역으로써 전체 면적의 90%를 차지한다.곤명호의 동쪽에 있는 웅장한 17공교 (十七孔桥)는 동쪽 기슭과 동궁문을 연결하고 있는데 다리 란간에는 모양이 각각 다른 544마리의 돌사자가 새겨져 있다.중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곤명호의 풍치수려한 돌배와 여러 개의 돌 다리, 아름답게 조각된 수많은 석상들도 이화원의 경치를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돌사자)
(다리)
이화원은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처음 조성되여 1750년 청나라 건륭황제때 대폭 확장되였는데 당시에는 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1860년 제2차 아편전쟁때에 영프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였고 모조리 략탈 당했다.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고 1888년에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리용하였는데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량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과거 지배계급의 사치와 향락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 진것인지 잘 알수 있다.
이화원을 날이 저물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곤명호기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화원의 저녁노을을 호수기슭에서 보고 사진에 남기기 위해서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호수의 동쪽기슭에 모여들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전문가,애호가뿐아니라 관광객들도 휴대전화로 노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이다.
(촬영 애호가들)
하다면 저 사람들은 이화원의 저녁노을에서 무엇을 보고있을가, 저 황혼속에서 무엇을 찾으려는걸가. 그리고 저 노을을 보며 왜 저리도 기뻐하는것일가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속에 나의 눈앞에는 흘러간 이화원의 력사가 주마등처럼 황혼속에 어려오는듯 싶었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궁중생활, 호화로운 탕진과 야욕으로 흘러간 이화원의 낮과 밤들, 세월의 흐름속에 바람처럼, 꿈처럼 사라져버린 인생들,
그 허무함속에서도 이화원은 력사의 이끼에 덮혀있는 산과 호수,건물들을 거느리고 어제도 오늘도 저녁노을을 부르고 있다 .
지금 관광객들로 붐비는 바로 저 곤명호기슭의 정각에서 서태후와 황제일족들도 저녁노을을 바라보았으리라.그리고 세세년년 향락이 이어지길 바랐으리라.
저녁노을은 예나 제나 변함없이 피여나지만 그 향유자는 바뀌였다.
옛날 황족들이 권세를 뽐내며 노을 비낀 곤명호기슭에서 향락을 즐겼다면 지금은 평민들이 어제날 서태후의 발길이 찍혀졌을지도 모를 장소들에서 휴식의 한때를 보낸다.
황제로부터 평민으로 그 소유자가 바뀐 이화원의 저녁노을,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은 흘러간 중화민족의 력사를 보고 있고 이 황혼속에서 높아진 자기들의 존엄과 영예, 자부심을 뿌듯이 느끼고있는것이 아닐가.
이화원의 저녁노을은 중화민족에게 주는 태양의 축복처럼 언제나 붉게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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