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30 17:29:42 | cri |
그때 그 시절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교동(膠東)반도의 제일 큰 사찰이었다. 조선반도와 일본에서 대륙으로 구법의 길에 올랐던 승려들이 늘 이 사찰에 숙박했다. 이에 따라 적산법화원은 산동(山東) 나아가 해외에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남쪽에는 암석으로 된 산마루가 있고, 정원에는 맑은 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서남쪽과 북쪽은 이어지는 산봉우리가 병풍을 이루고 동쪽은 멀리 바다가 바라보인다."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 793~864)이 그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한 '적산법화원'의 한 장면이다. 그때 엔닌은 전후 2년 9개월 동안 '적산법화원'에 객거(客居)했다.《입당구법순례행기》는 현장(玄藏)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마르크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의 하나로 불린다.
적산은 산동성(山東省) 영성시(榮成市)의 석도(石島)에 위치, 바위가 붉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른 이곳에는 진한(秦漢) 이래의 역사유적을 늘 만날 수 있다. 바위마다 이야기가 있고 산마다 이야기가 있다.
적산의 사찰 법화원에도 이야기가 있다. 적산법화원은 특별히 신라인들의 불사(佛事)를 위해 만든 신라사찰이다. 사찰을 세운 사람은 신라인 장보고(張保皐, ?~846)라고 엔닌이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의 무장이자 무역상으로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인물이다.
적산풍경구에는 장보고를 기리기 위한 전시관이 특별히 설치되어 있다고 가이드 유씨가 말한다.
"'장보고전시관'은 지금 한국 청소년들이 해외에서 수학하고 외국인이 적산을 관광하는 주요한 목적지로 되고 있습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 따르면 법화원에서 경문(經文)을 강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모두 신라인이었으며 또 경문을 말하는 사람은 신라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찰을 세울 때 독경을 하기 위해 청한 첫 승려들이 천태종파(天台宗派)로 《법화경》을 독송했기 때문에 사찰의 이름을 '적산법화원'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매년 한가위(음력 8월 15일)에는 신라인들이 사원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명절을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한때 적산법화원은 신라인이 당나라를 오가는 역참과 문화 활동의 중심으로 되었다.
옛날 신라사찰의 부근에는 통상 신라인들이 마을을 이뤄 살고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적산법화사가 위치한 산동반도 일대에만 해도 모평(牟平)의 도촌(陶村)과 소촌포(邵村浦), 유산포(乳山浦), 문등(文登)의 적산촌(赤山村), 유촌(劉村), 내주(箂州)의 남승가촌(南升家村)에 모두 신라인들이 집거, 신라촌(新羅村)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산법화원이 위치한 옛 적산촌은 현재 적산풍경구로 거듭나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의 적산법화원은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건, 1990년에 개관했다. 적산 정상에 위치한 거대한 적산명신(赤山明神)은 바다의 신인데, 일부에서는 바로 해신(海神) 장보고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가이드 유씨는 적산명신은 세계 제일의 해신상(海神像)이라고 자랑했다.
"적산명신은 세계적으로 제일 큰 동산인데요, 높이가 58.8미터나 됩니다. 또 중국에서 평안함을 기리는 제일의 신상(神像)입니다."
적산 풍경구에는 날마다 한국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 관광객은 거의 날마다 1천명에 달했다. 어떤 경우 적산풍경구를 찾는 국외인이 오히려 국내인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해마다 관광객은 연 60만 명에 이르는 등 태산(泰山)과 곡부(曲府)와 더불어 산동 관광의 목적지로 되고 있었다.
유씨 같은 가이드가 적산풍경구에 몇 십 명이나 된다고 말한다. 한국 관광객은 주로 위해에 기착하는 페리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바닷길을 통해 적산풍경구에 이르고 있었다.
기실 천 년 전에 당나라로 구법을 떠난 엔닌도 이처럼 바닷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옛 신라인이 다니던 이 바닷길은 신라인이 다니던 해상에 '실크로드'였다. 이 '실크로드'는 육지와 가까워서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또 견당사(遣唐使)나 상선(商船)에 탑승하여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당사에는 신라인 통역이 동승하고 있었다. 엔닌은 또 적산법화원 주지와 신라인들의 증명서류를 받아 등주(登州)에 가서 문첩(文牒, 지금의 여권)을 취득한 후 계속 서행했다. 그 시점이 840년 봄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5년 후 엔닌이 오대산과 장안을 경유하여 재차 등주에 도착했을 때 적산법화원은 "승려가 드물고 사찰을 훼손했으며 경문과 불상을 훼손했다." 당나라 무종(武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불교를 폐지하고 불사를 훼손했던 것이다. 엔닌이 부득불 일본으로 귀국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엔닌은 당나라 문종(文宗) 개성(開成) 3년(838)에 바다를 건너 양주(揚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불법을 배웠다. 이듬해인 839년 3월 20일, 엔닌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고용한 신라인 수부(水夫)가 양주와 일본에 이르는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아서 밀주(密州)에서 일본으로 통하는 항로를 선택했다. 밀주는 지금의 산동성 제성(諸城)을 말한다. 일행은 도중에 큰 바람을 만나 문등에 상륙하였으며 이에 따라 적산법화원에 가서 계속 구법하게 되었던 것, 신라인들이 도움을 받아 종국적으로 오대산으로 향한 것은 바로 이 법화원 행각으로 이어진 일이다. 적산법화원은 해운과 상업무역을 진행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연락 거점이었다. 또 이 거점은 상인과 구법승들이 다니는 육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되고 있었다.
엔닌은 미구에 적산법화사를 떠나 다시 내지로 향발했다. 이때 그는 유방(濰坊)의 청주(靑州) 용흥사(龍興寺)에 들리던 과정을 적고 있다. 용흥사는 그가 처음 들렸던 개원사와 더불어 당나라 때의 유명한 사찰이다.
엔닌 일행이 일부러 청주에 들린 것은 무엇보다 관가의 문첩을 받기 위해서라고 청주박물관 왕서하(王瑞霞) 부관장이 밝힌다.
"청주는 당나라 때 정부 아래의 행정기구였지요, 산동 지역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문(衙門)에 통과되어 문첩을 받으려면 청주에 와야 했습니다."
청주는 당나라 때 등주 일대에 상륙한 후 내륙으로 통하는 경유지였다. 당나라 조정은 청주에 이른바 '상서 압량반사 아문(尙書押兩藩使衙門)' 즉 약칭 '압신라발해양반사(押新羅渤海兩藩使)'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조정이 산동에 발해와 신라, 일본의 접대를 담당한 기구였다. 이 기구는 공문 검사와 상주를 즉 조정에 대한 보고를 책임지고 있었다.
외국 사절과 승려, 상인은 현지에 이른 후 주와 현 관아에서 발급한 문첩을 소지해야 통행할 수 있었다. 다른 현으로 가려면 문첩을 바꾸고 그 현의 공문을 받아야 관아의 보호와 세속적인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사찰이나 여인숙은 사사로이 외국인을 유숙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문첩은 엔닌 일행의 오대산(五臺山)의 순례에 꼭 필요한 증명서류였다.
개성 5년(840) 3월 21일, 엔닌은 마침내 청주에 도착했다. 이날 엔닌 일행은 구미점(韭味店)의 장씨집에 숙박, 이튿날인 22일 청주 시내에 도착하여 용흥사의 신라원(新羅院)에 입주한다. 신라원은 주로 신라인을 접대하기 위한 숙박소였다. 신라원은 신라관(新羅館)처럼 육상 '실크로드'의 역참운수 계통에서 한 고리로 되고 있었다.
참고로 당나라 정부는 외국 사절단을 위해 여러 지역에 관사를 따로 마련했다. 등주는 당나라 정부가 신라와 발해 사절단에 규정한 입국 항구였으며, 따라서 등주에는 특별히 그들을 상대한 관가가 있었던 것이다. 등주 성남(城南) 거리의 신라관과 발해관은 바로 신라인과 발해인을 상대한 관사의 이름이었다.
청주 용흥사에는 신라원을 제외하고 또 와불원(臥佛院), 천궁원(天宮院) 등 일여덟의 별원이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와 금나라가 지핀 전쟁이 붉길이 고찰에 옮겨 붙으면서 사찰은 황패하게 되었고, 명나라 초, 청주 관가에서 번왕(蕃王)의 저택을 늘려지으면서 사찰 옛터는 소실되었다.
왕서하 부관장은 용흥사이 청주에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용흥사의 유적은 구체적인 위치와 범위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요. (1996년) 운동장을 만들면서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용흥사는 동방의 명찰(名刹)로서 그때 6천 명 승려가 있었다. 사찰에는 또 5,6세기의 북위(北魏), 북제(北齊)부터 수․당(隋․唐) 시기에 이르는 정교한 불상이 있었다. 현재 용흥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청주박물관 특별전시되고 있다.
엔닌이 용흥사에 이른 후 용흥사의 승려가 그를 대신하여 수속을 밟았다. 엔닌의 일기에 따르면 청주 아문(衙門)은 엔닌 일행에게 수속을 마친 후 또 천 3필, 차 여섯 근을 하사했다고 한다.
청주 관가의 하사품은 특례가 아니었다. 《불조통기(佛祖統記)》에 따르면 정관(貞觀) 8년(634)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산동반도 내주(箂州)의 상주문을 받는다. 그 내용인즉 고려 삼국(고구려, 신라, 백제)의 승려가 중국에 와서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데, 그 허실이 뭔지 관망하고자 한다는 것. 이에 이세민은 그들을 막는 건 국익에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인정하고 고려 삼국 구법승들의 진입을 허락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때부터 당나라는 반도 구법승들에게 수용정책을 취하며 또 "번승(蕃僧)이라면 해마다 비단 25필을 주며 사계절 계절에 따른 복장을 주라"는 규정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엔닌은 그들이 구법 여로에서 당나라 지방 주와 현 정부가 시사(施舍)한 쌀과 밀가루 등 생필품을 받았다고 여행기에 기록하고 있다. 엔닌 일행은 위해의 문등현과 등주에서 서행할 때 역시 이 지역의 역참운수 계통을 이용했으며 신라원을 포함하여 선후로 초현관(招賢館), 사산관(斜山館) 등 관사에 숙박했다.
당나라 때 역참은 30리마다 하나가 있었다고 법전 《당육전(당육전)》이 기록하고 있다. 일부 관사는 교통도구는 제공하지 않고 관원과 관가의 손님만 초대했다. 여인숙은 대부분 개인이 경영하고 내왕하는 길손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했다.
엔닌 일행은 이어 치주(淄州), 제(齊州), 덕주(德州), 패주(沛州), 당주(唐州), 기주(冀州), 조주(趙州), 진주(鎭州)를 경유, 2,990리를 거쳐 마침내 오대산에 도착한다.
오늘날 옛 '실크로드'에는 역마(役馬)가 아닌 고속철이 달린다. 우리 일행은 적산의 법화원을 떠나 반나절에 청주의 용흥사에 도착하고 있었다. 새로 발굴, 재현된 옛 사찰에는 향불의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범패(梵唄)의 음악이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 년 전 대륙과 반도를 오가던 승려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금세라도 옛 '실크로드'의 '일대일로'에 다시 떠오를 듯싶다.
[특별취재팀 조설매, 권향화, 김호림]
korean@cri.com.cn
<전재 및 재배포할 경우 출처 명시 필수!>
China Radio International.CRI. All Rights Reserved.
16A Shijingshan Road, Beijing, Chi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