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7 18:48:16 | cri |
현재 영문 Comfort Women(위안부)는 날따라 그 죄악의 본질인 Sex Slaves(성노예)로 대체되고 있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해(上海)에서 중국군을 향해 진공을 발동했다. 이를 전후해 상해에는 일본군 관병들을 위한 "위안소"와 "위안부"들이 나타났다.
1937년 7월, 일본군이 전면적인 중국 침략 전쟁을 발동했고 일본군은 중국의 점령지에서 전면적으로 "위안부"제도를 보급했다.
태평양전쟁이 폭발한 뒤 일본군의 위안소 역시 동남아시아의 점령 지역에로 확장됐고 일본이 전패, 투항할 때에 이르러서야 이 군사성적인 노예제도가 종료됐다.
오늘날 중국의 중앙당안관, 요녕(遼寧)성, 길림(吉林)성, 흑룡강(黑龍江)성, 상해시, 남경(南京)시 등 지의 당안관에는 여전히 일부 "위안부"와 관련된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에는 전시에 형성된 일본 측 기록과 일본이 점령 구역에서 육성한 괴뢰정권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중국 정부가 피점용 자산을 접수하고 전쟁손실 조사, 일본 전범 심문 과정에 형성된 기록들도 있다. 이런 기록들은 일본군이 그때 당시 "위안부"를 강제 징용하고 "위안소"를 개설한 역사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보였으며 얻기힘든 인류의 역사 기억이다.
길림성(吉林省) 당안관에 소장된 중국 침략 일본군 관동헌병대와 위만주국 중앙은행 등 기록에서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1. 일본군 점령 구역 각 지 "위안소" 시설 상황에 관한 자료.
2. 일본 군인 수 및 "위안부" 배치 비율에 대한 통계.
3. 일본군이 "위안소"를 찾아 "위안부"를 이용한 인수 통계.
4. 일본군이 공금으로 "위안부" 관련 비용을 지불한 기록.
5. 일본 헌병대가 그 군인이 중국 및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 "위안소"에서의 관련 상황에 대한 조사 기록.
상해당안관에 소장된 상해 공동 조계지 경무처 기록에는 1938년 4월, 친일분자들이 중국 여성을 일본군 "위안소"로 팔아넘겨 "위안부"로 사용하게 한 사건에 대한 조사와 결제 서류가 있다. 재중 일본 괴뢰정권기구 기록에는 "위안소"를 개설한 보고, 신청서, 위치 안내도, 영업허가증과 통계표가 있다.
195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일본 전범을 정찰, 처리해 형성된 기록에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립하고 중국, 조선반도,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및 기타 국가 여성들을 강박해 "위안부"로 이용한 내용과 관련된 일본 전범들의 서면 자백, 자술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군 제117사단장 스즈키 케이크의 서면 자백서에는 안휘(安徽) 조현(曹縣)에 위안소를 설치해 20명 "중국 여성 및 조선 여성을 유괴해 위안부로 사용"했고 1945년 "주둔지에 이른바 위안소를 설립할 것을 명하고 60명 중국여성과 조선여성을 위안부로 유인했다"고 기록됐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여성을 성노예로 강제징용한 것은 여성의 염원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였다.
2013년 7월, 중국의 연구인원들이 일본을 찾아 1956년에 중국에서 석방된 8명 일본 전범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 8명 전범들은 그때 당시 중국에서 범한 죄행 등 상황을 진술했다. 그중 한 명인 에하도(绘鸠毅)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 산동(山東)에 있는 동안 "포로 중에 한 여자가 있었고 하사관의 위안부로 강제징용됐다. 소각장(索格莊)에서 장기간 주둔해야 했고 음식물 공급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그는 그녀를 죽여 그녀의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혼자만 먹은 것이 아니라 중대원들에게 대대 본부에서 고기를 보냈다 거짓말하고 전 중대 모두에게 먹였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중국의 점령지, 예를 들어 동북, 화북, 화중, 화동 및 화남 지역에 보편적으로 위안소를 설립했으며 일본군 "위안부"제도가 실시된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주었다. "위안부"에는 중국여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여성도 있었고 네덜란드 령 동인도(오늘의 인도네시아) 자바, 암본 등 지의 여성도 있었다. 이는 "위안부"문제의 국제적 특징을 드러내기도 했다.
1993년 8월 4일, 그 당시 일본 정부 내각 관방장관을 지냈던 고노 요헤이가 일본 정부를 대표해 "위안부"(일본 성노예)문제 조사 결과, 즉 "고노담화"를 발표했으며 "진심으로 되는 사죄와 반성의 의미를 밝혔다."
고노 요헤이: 과거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운송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했고 위안부를 모집하는 부분에 있어서 주로 군부대의 요구에 의해 진행됐으며 관련 종사자가 담당했다. 이 과정에는 수많은 기만, 강박 등 본인의 의지에 위배되는 사례들이 존재했다.
1993년 6월, 유엔 세계인권대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폐지할 데 관한 선언"을 통과했으며 일본군의 "위안부"문제는 "전쟁 중 여성에 대한 노예제도"이며 질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6년 유엔인권위원회의 보고에서는 "위안부"제도는 2차 대전 시기 일본 정부에서 피해국 여성을 강박해 일본군의 성노예로 이용한 제도이며 일본 정부에서는 마땅히 사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하원에서는 2007년 7월 30일에 121번 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일본의 2차 대전 기간에 아시아 기타 나라의 여성을 강제 징용해 일본군의 "위안부"로 이용한 것을 질책했다.
2007년 11월부터 12월까지 네덜란드 의회 하원, 캐나다 국회 하의원과 유럽 의회에서도 연이어 위안부 제도를 질책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2014년 8월 6일, 나비 필레이 유엔 인권 최고대표, 인권고등판무관이 일본군의 "위안부"문제 해결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서 "위안부"문제와 관련해 전면적이고 공정하며 영구적인 해결방안을 작성해줄 것을 촉구했다.
2차 대전 시기의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비정의적인 침략전쟁이 인류에게 남긴 복구불가한 상처라는 확고부동한 증거이다. "위안부" 기록은 당시 가해국이였던 일본 자체의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및 기타 일본 침략 피해국의 기록도 있는 2차 대전 시기 시대적 기억에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우리는 오늘날 "위안부" 기록을 수집, 보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그 목적은 전 세계로 하여금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라는 이 모욕당하고 짓밟힌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요해하게 하고 인권에 대한 보호와 세계평화를 호소하는 동시에 인류 문명의 마지노선에 도전하는 이런 악행이 영원히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번역/신화망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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