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왕 (중국 역사 인물)
서주 왕조의 개국 임금인 주무왕 희발(姬發)은 주문왕의 차남이다. 형 읍고(邑考)가 상조(商朝) 주왕(紂王)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인해 주무왕은 왕위에 오르게 됐으며, '무'는 그가 죽은 뒤의 시호(諡號)다.
주무왕의 생몰년은 역사적인 고증이 없는 것으로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93세까지 살았다고 구전되고 있다.
주문왕 통치 50년이란 세월동안, 상조를 토벌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했다. 내정을 개혁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온갖 정력을 몰부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재를 중시한 것으로 주나라는 날로 번창했다.
희발이 왕위를 계승한 뒤, 계속 강상(姜尙)을 재상(國相)으로 임명하고 형제인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奭)을 조수로 두어 상조를 토벌하는 일에 적극 돕도록했다.
당시 상조의 주왕은 날로 잔인하고 흉폭했으며, 극도로 사치하고 탐욕스러웠다. 결국 충신 한 명 한 명을 잃게 되며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찔렀다.
바로 이때 주무왕은 기회를 노려, 도읍을 풍읍(豊邑)에서 호경(鎬京)으로 옮기고, 상조에 대해 또 한번의 탐구적인 공격을 진행했다. 이번의 진공은 주나라 군대에게 있어서 한차례 단련일 뿐만아니라 보귀한 실전 경험을 갖게 된다.
2년 뒤, 주무왕은 맹진(孟津)에 총 800명의 제후를 불러 놓고 맹약을 한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희발은 직접 전차(戰車)300대에 근위무사 3000인, 갑병(甲兵)4만5천 명 그리고 소국(小國)의 병력을 연합하여 동쪽으로 진격해 주왕에 대한 토벌을 시작한다.
맹진에서 진행된 궐기대회에서 그들은 주왕의 여러 죄행을 나열했으며, 하늘을 도와 주왕을 벌한다는 뜻을 표한다. 이번 궐기대회의 소집은 주왕을 토벌하는 연맹군들의 투지를 더해줬는가 하면 작전의 의의와 그들의 손에 거머쥔 사명감을 각인시켜줬다.
쌍방은 격렬한 투쟁을 벌렸다. 주왕을 토벌하는 연맹군은 일치단결한 정의의 힘이라면, 상조 군사들은 황급하게 허둥허둥 전쟁에 나선 흩어진 모래알과 같았다.
아주 빠른 시간내에 상조 군대를 격파한 주군은 바로 조가(朝歌)성을 점령했다. 주왕은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대세 앞에서 녹대(鹿臺)에 올라 자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주나라 군대는 번개같은 속도로 상조 도읍을 점령한 것으로 상조(商朝)의 멸망을 선고한다.
주무왕의 상조 토벌은 중국 역사상의 한 차례 대사다. 구체적인 시간에 대해 아직 정확한 고증은 없지만 보통 기원전 1057년으로 얘기하고 있다.
희발이 상조를 멸하고 서주(西周)를 건립했으며 도읍을 호경에 정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의 세번째 노예제왕조다.
자신의 통치를 공고키 위해 희발은 주공의 상조 백성을 위로하여 천하를 안정케 하는 방안을 채용했다.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뉘어 친족과 공신을 책봉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제후국을 건립하게 했다. 강상은 영구(營丘)에 도읍을 정해 제나라(齊)를 건립했고, 주공은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해 노나라(魯)를 건립했다. 한편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상나라 도읍에 남겨 은후(殷侯)로 책봉하여 상조의 유민들을 안정시켰다.
이와함께 주무왕은 범인을 석방하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생산을 발전시킨 것으로 서주 초기 정치의 안정, 경제의 발전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추동했다.
서주 건국 3년 후, 발희는 병으로 타계하자 아들 희송(姬誦)이 그의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희송의 나이가 아직 어린것으로 주공단이 대신 국정을 다스렸다.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건립한 주무왕은 중국 역사상 이름 날린 군왕 중 하나로, 오늘까지 후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