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張衡)은 자는 평자(平子)이며 하남성 남양(南陽) 출신이다. 장형은 낭중(郎中)과 상서시랑(尙書侍郞)을 역임했으며 선후로 14년간 태사령(大史令)으로 있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장형은 어릴 적부터 배움에 부지런했으며 사서오경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소년시절 장형은 문학에 대해 큰 흥취를 가졌는데 당시 저명한 문학가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웅(楊雄)이 쓴 글을 즐겨 읽었다. 장형은 어릴 적부터 사부(詞賦) 창작에서 문학재능을 과시했다.
장형은 "문을 닫아걸고 성현들의 글만 읽는"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 생활에서 경험을 모색하고 실천 속에서 지식을 늘여왔다. 기원 94년 장형은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활에 대한 자신의 시야를 넓혔고 풍부한 생활경험을 축적했다. 그는 학술문화가 가장 발달한 장안 주변의 명산대천과 역사고적들을 돌아본 후 락양에 가서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있는 문인들을 친구로 사귀였다. 친구 중 마융(馬融)은 당시 사부 창작에서 이름난 문인이었다.
마융은 음악에도 능했는데 후에 그는 동한시기의 유학대가로 되였다. 당시 정론가로 소문난 왕부(王符)도 장형의 친구였다. 왕부의 저서 "제부론(제夫論)"은 지금까지 유전되어 왔는데 이 저서는 동한시기 사회상황을 연구하는 진귀한 역사자료로 되였다. 친구들 중 최원(崔瑗)은 장형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이다. 최원은 천문, 수학, 역법에 대해 조예가 깊었는데 장형은 최원을 사귄 후로 자주 그와 만나면서 천문, 수학, 등 과학에 대해 흥취를 갖게 되였다. 장형이 후에 천문과 수학 등 과학 분야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은 것은 최원의 영향과 갈라놓을 수 없다. 당시 많은 학자들은 학술상 부동한 주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형은 그 어느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인 사고방식으로 여러 가지 학술 주장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장형이 후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되었다.
기원 111년 한안제(漢安帝)는 중앙과 지방의 대신들에게 지덕이 겸비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했는데 그 때 장형은 천거를 받게 되였다. 장형은 당시 서울이었던 락양에 올라와 랑중으로 되었다.
박학다재한 장형은 락양에서 천제결구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장형이 생활한 시대에는 천체운동과 우주구조에 관한 학설이 3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천설"과 "혼천설", "선야설"이다. 개천설은 하늘이 우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다고 인정하고 혼천설은 하늘은 혼원한 것이고 대지는 공과 같은 원형이며 일월성진이 지하로 내려 갈 수 있다고 인정한다. 선야설은 하늘이 일정한 형태가 없고 기체로 충만 된 일망무제한 공간이며 해와 달, 별은 기체에 떠있다고 인정하였다. 장형은 천체운행규율에 대한 인식과 실제관찰에 근거하여 이 세 가지 학설을 참답게 연구한 기초에서 혼천설이 관측한 실제에 비교적 맞는다고 인정했다. 그는 선배들이 연구한 기초에서 혼천 사상을 정확하게 표달할 수 있는 계기인 "혼천의" 를 만들어내고 "령헌", "령헌도", "혼천의도주" 등 천문학 저서를 펴냈다.
장형이 평생 창작한 저서에서 "령헌"이 가장 유명하다. 이 저서는 하늘과 땅, 해와 달, 별과 진의 생성과 운동을 천명하는 천문 이론 저서로서 장형의 천문 연구 성과를 대표한다. 장형은 저서에서 당시의 천문지식을 총화하고 시간과 공간에서 우주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상을 제기했다. 그는 또한 달 자체는 빛이 없으며 달빛은 햇빛이 반사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형은 다른 한 저서인 "혼천의도주해"에서 지구가 해를 일 년간 에도는 시간이 약 365일 6시간이라고 기술했다. 이는 근대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시간과 매우 근접하다.
장형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것을 안 한안제는 기원 115년에 태사령으로 명했다. 장형은 락양 평창문에 있는 령대(靈臺)가 비록 건축구조가 웅위롭지만 천체를 관측하는 의기가 오래 동안 수건을 받지 못해 사용이 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형은 형상적으로 혼천 학설을 구현하는 천문관측의기인 혼천의(渾天儀) 만들기로 결정했다. 처음 그는 참대로 작은 혼천의 모형을 만들었다. 기원 117년 장형은 수력(水力)으로 자동 회전하는 혼천의를 만들어냈다.
혼천의 외에도 장형이 세계 과학사에 대한 위대한 기여는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지진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의기인 지동의(地動儀)를 발명한 것이다. 동한시기 중원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장형이 태사령으로 있던 기간만 해도 해마다 두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장형은 지진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진을 감지하고 기록하는 의기를 만들어 내리라 작심했다. 기원132년 장형은 지진 진원지 방향을 측정할 수 있는 첫 지동의를 만들어 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후풍지동의는 뽈 모양의 의기인데 직경이 2미터이상이고 외벽에는 8마리의 용이 균형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용두는 8개 방향으로 향했으며 용 입은 작은 구리 공을 물고 있다. 용두 밑의 지면에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는 8마리의 구리로 만든 개구리가 있는데 용 입에 있는 작은 구리공이 떨어지면 개구리 입으로 들어간다. 후풍지동의 내부에는 곧추 세워진 구리기둥이 있는데 그 중심이 높고 지탱면이 작으며 약한 진동이 생겨도 쉽게 기울어진다. 만일 어느 지역에 지진이 발생한 경우 구리기둥의 밑 부분이 약간 움직이면 그것은 지레대 연동장치를 통하여 같은 방향의 용 입에 있던 작은 구리공이 그 밑에 있는 개구리 입에 떨어지게 된다. 비록 후풍지동의가 지진중심의 대체적인 방향만 측정하였으나 그 당시 세계적으로 앞선 발명이라 할 수 있다.
장형에게 두 가지 애호가 있었는데 하나는 기제제작과 발명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창작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천부를 가진 장형은 시가, 사부, 산문 창작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장양의 대표작에는 장안과 락양의 풍속을 그리며 황제를 칭송한 "이경부(二京賦)", 장자의 사상을 담은 "사현부(思玄賦)", 생의 종착지는 귀향이라고 주장한 "귀전부(歸田賦)"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