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현종의 이름은 이용기인데 당예종의 셋째 아들이다. 당현종은 3살에 초왕에 봉해졌고 장수 2년(693년) 임류왕으로 되였다. 당현종의 조모인 무측천이 죽은 후 당중종이 무능하여 대권을 황후인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가 잡았다. 위황후 일족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미리 간파한 당현종은 위황후 일당이 기원 710년에 황제 중종을 독살하려고 할 때 과단하게 궁전정변을 일으켜 위황후 일당을 일망타진했다. 그 후 당현종은 자신의 부친을 예종으로 복위시키고 태자가 되였다.
당현종은 자신의 정치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치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당예종 역시 무능한 황제여서 대권을 잡지 못했다. 대권은 당예종의 누나인 태평공주 손에 들어갔는데 당현종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태평공주와 암투를 벌였다. 두 세력 간의 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연화원년인 712년 당예종은 태평공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당현종에게 넘겨주었다. 태평공주는 당현종을 폐위시키기 위해 그 해 7월 4일 궁전정변을 일으키려고 했다. 당현종은 선손을 써서 7월 3일 우림군을 거느리고 태평공주 일당을 제거했다.
당현종은 새 황제로 등극한 후 2년이 지나 연호를 개원으로 고치고 인재를 등용해 그들의 보좌를 받으며 밤낮으로 정사에 몰두했다. 당현종을 보좌하던 요숭은 당현종이 직접 등용해 재상자리에 앉힌 신하이다. 요숭이 내놓은 많은 새로운 조치를 당현종은 적극 채납해 나라를 다스리는 시정방침을 제정했다.
당현종은 엄격한 시험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평가하는 기준을 내놓았고 상벌을 엄하게 집행했다.
당시 당나라의 최대의 강적은 돌궐이었는데 돌궐은 자주 당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 당현종은 당나라 정권을 공고히 하고 통일을 수호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해 군사력을 높혔다. 당현종은 변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부병제에 대해 개혁을 단행했다. 당현종은 관내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군사를 징집하여 변방에 배치했다. 그는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이 군사훈련에만 몰두하게 하기 위해 모든 부역을 면제시켰다. 하여 당나라 군사력은 전례 없이 제고되었다.
당현종은 중아시아로 통한 교통로를 다시 개통해 대외 경제문화 교류를 추진했다. 마침내 당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관계가 형성되면서 아시아의 정치와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나라가 후에 세계적으로 제국이 될 수 있는 기초로 되었다. 이밖에도 당현종은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기 위해 부역을 감소시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보다 편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하여 백성들은 당현종의 덕을 기리게 되였고 나라 재정도 날이 갈수록 윤택해졌다. 당현종이 사회경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했기에 경제가 전례 없이 번영해 당현종이 즉위한 개원 년대는 당태종에 이어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기로 되였다.
그러나 개원 30년, 연호를 천보로 고친 당현종은 이때부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혼음방탕, 사치, 환락에 빠져 당나라는 위기에 직면했다. 당현종은 그칠 줄 모르는 사치와 향락 속에서 귀비 양옥환에게 빠져 조회마저도 나가기 싫어했다. 그는 양귀비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나 다 방법을 대여 해결하고야 말았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한번은 양귀비가 신선한 려지를 먹고 싶다고 했다. 서북에 위치한 장안에는 남방의 과실 려지가 없었다. 당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려고 관원들에게 사람을 띄워 빠른 말을 역참에 대기시켰다가 계주봉을 전하듯이 려지를 장안으로 시급히 운송해 오도록 령을 내렸다. 하여 려지가 양귀비 손에 전해졌을 때까지도 여전히 노라발갛고 향기로웠으며 맛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종 말년의 재상 이임보는 학문과 재간이라곤 꼬물만치도 없는 간신이었다. 그는 궁궐내의 환관, 비빈과 결탁해 가지고 19년이란 긴 세월동안 당현종의 눈과 귀를 통제했다. 이림보는 권력을 잡은 후 조정의 문관들을 배척하고 변강의 절도사들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시기했다.
절도사는 변강의 방어를 강화하려고 설치한 군진의 행정, 재정과 군대를 관리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세력가이다. 절도사 중에는 당현종과 이임보가 총애하는 안록산이라는 절도사가 있었습니다. 당현종과 이임보의 신임을 얻은 안록산은 비밀리에 병력을 늘이면서 당현종이 죽기만 하면 반란을 일으키려고 준비를 다그쳤다. 이임보가 병으로 죽자 양귀비의 동족 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직을 물려받았다. 안록산을 밉게 보아오던 양국충은 당현종에게 안록산이 꼭 모반할 것이라고 간언했지만 당현종은 양국충의 말을 듣지 않았다.
755년, 안록산은 면밀한 준비를 마친 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으로 일어난 안사지란이라고 한다. 당시 중원일대는 백여년 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당현종의 군사들은 싸울 줄 몰랐다. 하여 안록산 군사는 파죽지세로 남으로 진격해 왔는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당현종은 부랴부랴 성도로 도망쳤다. 피난길에 오른 당현종은 끝내 양귀비를 잃고 아들 이형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을 태상왕이 되였다가 762년 생을 마감했다.
안사지란으로 하여 번화하던 도시는 폐허로 되였고 사회 경제는 엄중한 파괴를 입었는데 이때로부터 당나라는 더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