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8 17:11:57 | cri |
그들은 중국의 아픔과 한,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전사들의 영용함과 충성심을 카메라에 실었고 중국 공산당의 영도 하에 대동단결되어 항일했던 그 시대의 모습도 담았다.
그들은 극히 열악한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생명력과 예술매력, 역사적 영향력까지 겸비한 영화작품을 창작해냈다. 이는 당시 광범위한 대중들을 격려해 항일의 전선에 뛰어들었을 뿐만아니라 그 특수한 시대의 소중한 기억을 후대들에게 남겨 주었다.
이런 뜨거운 애국심을 영상에 담았던 인사들은 점차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과 정신은 후대들에게 오래오래간직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연안과 팔로군(延安與八路軍)"천하민심 연안으로 향하다
왕일암(王一岩) 연안영화단(延安電影團) 중국 공산당이 세운 최초 영화기구
1937년 일본군이 상해를 침략하자 주은래(周恩來)는 당시 우수한 문예 종사자들을 상해에서 항일전쟁의 영도 중심지인 무한(武汉)으로 철수하게 했다. 그후 무한에서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주은래가 정치부 부부장을 맡고 곽말약(郭沫若)이 문예정치부 제3청 청장을, 양한생(陽翰笙)이 판공청 주임을 맡았다.
그때 원목지(袁牧之)가 양한성을 찾아 팔로군 항일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것을 제기했다. 원목지는 본인이 직접 구상, 촬영, 출연한 중국 최초 유성 영화 "도리겁(桃李劫)"을 제작한 유명감독이다. 주은래는 원목지를 홍콩으로 파견해 촬영기계와 필름을 구입하게 했다. 원목지는 홍콩 현지에서 요승지(廖承志)의 도움으로 16밀리미터의 촬영기 등 기계와 수만미터의 필름을 구입해 들였다. 또한 무한으로 돌아왔을 때"4억인민" 촬영 중인 네델란드 다큐 대가 요리스 이벤스를 만나 촬영기자재와 남은 필름도 지원받았다.
1938년 가을 원목지와 오인함(吳印鹹)은 촬영기자재와 영화필름을 들고 혁명성지인 연안으로 향했다. 그때 팔로군 총정치부 영화단이 세워졌고 "연안영화단"이라 불렀다. 총정치부 부주임 담정(譚政)이 단장을 겸하고 원목지가 편집 감독과 예술창작을 책임졌다. 영화단이 성립된 후 원목지는 취재를 통해 각본창작을 마쳤고 다큐의 제목을 "연안과 팔로군"으로 정했다.
1938년 10월 섬북공학, 항일군정대학 등 청년과 학생들은 화교가 기증한 트럭으로 연안 영화단과 함께 황릉현(黃陵縣)에 도착해 "연안과 팔로군" 촬영을 시작했다.
황제는 중화민족의 선조이기에 특별히 황제릉에서 첫 촬영을 했던것이다. 촬영에 참여했던 8.1영화제작소 초대 공장장이며 전임 국가영화국 국장인 진파생(陳播生)는 그때 필름이 부족한 원인으로 촬영은 엄격히 원목지의 취재 요강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회억했다. 영화의 처음 장면으로 황제릉의 석비가 등장한다. 두번째 장면은 도로에서 걷고 있는 청년 남녀학생들을 부감 촬영하고 세번째, 네번째는 진반 등 청년 학생들이 배낭을 메고 각자 다른 방향에서 연안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이 촬영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어느날 아침 촬영사 오인함이 연안 남문 성벽에 촬영기를 배치하고 진반 등 청년학생들과 팔로군 전사들이 줄지어 성벽아래 대기해 있었다. 감독의 "액션"소리와 함께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견지하자"는 거대한 표어 앞을 지나가는 장면을 찍으려 할 때 갑자기 내린 폭우로 급히 촬영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원목지와 촬영사 오인함 등 영화단 성원들은 "연안과 팔로군" 촬영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모택동, 주덕 등 중앙 지도자들의 근무하는 모습도 담았고 섬서, 감숙, 녕안 지역의 정치생활, 생산, 경제발전도 기록했다.
또한 항일군정대학, 섬북공학, 노신예술학원 등 학교 학생들의 학습생활, 연안의 자연풍모, 산서동남과 산서서북, 하북지역의 팔로군, 민병, 아동단의 항일투쟁 모습도 담았다. 현재 잘 알려진 노먼 베쑨의 근무하는 모습도 이 다큐에 들어있다. 그들은 매 장면마다 "천하인심이 연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다큐멘터리 "연안과 팔로군"은 초기 촬영을 마쳤지만 전력, 설비 등 편집조건이 구비되지 않아 원목지와 음악가 승성해(冼星海)는 소련에 가서 "연안과 팔로군"의 후기제작과 음악작업을 완성해야 했다.
1940년초 원목지는 촬영한 35밀리미터의 필름 일부분을 소련으로 가져가 1941년 소련 모스크바 영화제작소에서 기본 제작을 완성했다. 허나 1941년 6월 소련-독일전쟁이 폭발했고 모스크바의 모든 중요기구가 시베리아로 이동하던 과정에 절반 가량의 필름이 유실되었다.
1952년 81영화제작소가 성립되고 진번 등 일행이 소련에서 항전시기 촬영한 부분 영상자료를 찾아왔으나 이 영화의 모든 원판과 소재는 줄곧 찾지 못했다.
결국 관중들은 다큐멘터리"연안과 팔로군"을 감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상으로 시대를 기록하기 위한 중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노력과 정신은 후대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뒤로 영화단에서는 "남니만(南泥灣)", "10월의혁명", "신4군의 부대 생활" 등 대량의 다큐, 뉴스영화를 촬영해 그 시대의 소중한 영상자료를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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