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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경왕분(景王墳)
2016-06-29 14:35:22 cri

베이징 서부에는 차공장서로(車公庄西路)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경왕분(景王墳)이라 불렀다. 이런 지명을 가지게 된 원인은 거리 남쪽에 규모가 큰 능묘, 즉 경왕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왕분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사람들에게 과연 누구의 무덤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남겨준다.

역사적으로 '경왕(景王)'으로 불렸던 인물이 많지 않다. 역사 자료를 찾아보면 주경왕(周景王), 진경왕(晉景王) 등 몇명밖에 안된다. 하지만 사망한 후 베이징에 묻을수 있는 경왕이라면 원나라 이후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 이후 경왕에 봉해진 사람은 주재천(朱載圳) 뿐이다.

<명사(明史)> 와 <경왕재천열전(景王載圳列傳)>의 기재를 보면 주재천은 명세종(明世宗) 가정(嘉靖)황제 주후총(朱厚熜)의 넷째 아들이다. 가정황제의 맏아들 주재기(朱載基)는 출생 2개월 만에 요절하자 가정 18년에 황제는 둘째 아들 재학(載壑)을 태자로, 셋째 아들 재후(載垕)를 유왕(裕王)으로, 넷째 아들인 재천을 경왕에 봉했다. 재천 경왕에게 봉하여 준 땅은 안륙주(安陸州)였는데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안륙시(安陸市)이다. 주재천은 경왕에 봉해지고 땅을 가졌지만 봉지(封地)인 안륙주에 가지 않고 베이징에 있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명사>에서는 "황위 다툼을 꾀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황위를 다투는 그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은 점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주재천이 황위를 탐내 계략을 도모했는지 그 사실 여부를 알수 없지만 그는 방탕한 왕이었음이 틀림 없다.

주채천의 아버지 가정황제는 중국 역사에서 특이한 황제로 손꼽힌다. 가정황제에게 어린 맏아들 주재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의료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황제는 불길한 기운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특히 방술사 도중문(陶仲文)을 만나고 가정황제는 마음에 병이 생겼다.

도교(道敎)를 숭상했던 가정황제는 15세에 즉위해서부터 신변에는 항상 도사나 방술사들이 많았고 날이 갈수록 장생불로의 연금술에 푹 빠지게 됐다.

가정황제는 총애하던 방술사 소원절(邵元節)의 소개로 도중문을 만났는데 그의 도술에 크게 탄복하면서 가까이에 두고 조언을 들었다.

가정13년 8월, 황제의 맏아들 주재기가 출생해서 두달만에 병사하게 되자 가정황제는 더없이 비통해 했다. 이때 도중문은 황제에게 "이룡불상견(二龍不相見)"이라는 조언을 하게 된다. 뜻인즉 "황제는 용이요 태자는 잠재된 용이라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하며 아니면 둘 중 한명이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워낙 도술을 믿었던 가정황제는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그 말을 마음에 새겨 뒀다. 2년 뒤 가정황제는 주재학, 주재후, 주재천 세명의 아들을 얻어 기뻤지만 "이룡불상견"의 예언이 자꾸 떠올라 불안했다. 그리고 화를 피하기 위해 태자 책립을 뒤로 미루고 아들 얼굴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대신들이 태자 책봉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냐며 압력을 가하자 가정황제는 어쩔수 없이 둘째 아들 주재학을 태자에 봉했다. 주재학이 태자로 된 후 가정황제는 혹여 서로에게 해가 될까봐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자가 스승을 모시는 의식인 배사례(拜師禮)에 황제가 반드시 참가해야 했던 원인으로 부득불 참가했는데 공교롭게도 배사례가 있은 다음 날 부터 태자가 시름시름 앓더니 14세 어린 나이에 또 병사하게 된다.

그 후 가정황제는 더 없는 타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며서 다시는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고 아들을 절대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주재후와 주재천은 태자의 책봉을 받지 못하는 원인도 모른채 선택받기만을 기다렸다. 아마 이것이 주재천이 베이징을 떠나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주재천은 해마다 관원을 안륙주에 파견해 세금을 받아오게 했다. 하지만 파견된 관원들은 그 기회를 빌어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다. 그후 가정황제는 경왕은 본국에 돌아가라는 명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은 주재천의 태자의 꿈을 철저히 파멸시켰다. 셋째 아들 주재후를 베이징에 남기고 자신을 본국에 돌려보내는 저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지인 안륙주에 돌아간 주재천은 후세에게 그럴듯한 공적을 남기지 못하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 <명사>를 보면 안륙주에 돌아간 후 4년간 주재천은 가는 곳 마다 행궁을 건설하면서 백성들의 땅을 차지하고 인부를 징용했으며 민생은 도탄속에 빠졌다.

이렇게 안륙주에 돌아간지 4년만에 28세의 주재천은 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원한을 품고 병사하게 된다. 주재천이 죽자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그에게 봉해진 땅은 당시 법도에 따라 나라에서 다시 거둬들였으며 그의 시신은 다시 베이징에 옮겨 묻을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베이징 서부 외곽이었던 이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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