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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유리창대가(琉璃廠大街)
2016-08-01 15:45:55 cri

 

유리창대가(琉璃廠大街) 베이징에서 유명한 문화거리이다. 그 이름으로만 볼때 유리공장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곳에는 유리제품 뿐만 아니라 고서적, 골동품, 문방사보 등 희한한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오래된 문화거리 유리창거리에서는 100여년의 경영 역사를 자랑하는 가게들도 찾아볼수 있다. 또한 이곳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은 골동품 소장 애호가 또는 중국 문화에 심취해 있는 외국인들이다.

화평문(和平門) 남쪽에 위치해 있는 유리창거리는 길이가 1km도 안되는 동서 방향의 거리이다. 최초 작은 마을이었던 이곳은 금나라 요나라 시기에 "해왕촌(海王村)"이라 불렀다. 당시 이곳은 도심이 아닌 외지고 쓸쓸한 곳이였다.

원나라 시기에 이르러 이 마을은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족들의 도자기에 큰 애착을 가졌던 몽골인들은 건축이나 일상 생활에서 대량의 도자기 제품을 수요했다. 하여 원나라 정부는 베이징 외곽에 도자기 공장을 세웠고 민간에서는 이런 공장을 "관요(官窯)"라 불렀다. 바로 해왕촌이라 불렀던 이곳에서 유리 기와 즉 오지 기와를 구웠다.

유리창거리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본다.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 명성조(明成祖)가 도읍을 남경(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면서 내성(內城) 즉 자금성(紫禁城)을 건설하게 된다. 당시 대량의 궁전과 건축이 건설되면서 자연히 관요의 규모가 한층 확대됐다.

전한데 의하면 당시 조정의 공부(工部)가 5대 공장을 건설했는데 유리창 즉 오지 기와 공장이 바로 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유리창은 베이징성 밖에 있었다. 명나라 가정(嘉靖) 32년(1554년)에 베이징 외성(外城)이 건설되면서 유리창은 성안에 들어오게 됐고 더이상 외진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 아닌 베이징성 내 하나의 부분으로 됐다.

이런 "신분"의 상승으로 유리창의 지위 또한 달라졌다. 도시 이미지를 위해 관청에서는 오지 기와를 굽는 공장을 지금의 문두구(門斗溝) 지역의 작은 마을에 옮겼다. 그리고 그 마을은 유리거촌(琉璃渠村)이라 개명했다.

더이상 오지 기와를 굽지 않는 유리창이지만 그 역사를 기록하는 지명은 지금까지 남겨졌고 좁고 긴 골목은 유리창대가라는 이름을 가졌다.

유리창대가는 사실 처음에는 넓고 큰 거리가 아니라 베이징의 작은 후퉁과 다름 없는 평범하고 작은 골목이였다. 이 거리가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청나라때 부터였다.

순치(順治)년간에 관청에서는 "만한분성거주(滿漢分城居住)" 즉 만족과 한족이 분리되어 거주하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만족은 자연히 베이징성 중심부에 자리잡았고 한족은 외성에 집중됐다. 당시 유리창은 외성 서부에 위치했고 많은 한족 관원들이 이곳에 집거하게 됐다. 또한 전국 각지의 회관이 대부분 이곳에 모여있어 상경한 외지인들이 많았다.

한편 청나라때 해마다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수험생들이 베이징에 모여들었다. 당시 과거시험을 보러 온 서생들은 하나같이 유리창대가 일대에 머물렀다. 이곳은 각지의 회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방값이 싸고 서생들에게 필요한 문방사보를 쉽게 구할수 있었던 것이 원인이였다.

대량으로 모여든 한족 관원들과 각지의 서생들은 도서 시장을 즐겨 찾았다. 하여 명나라때 흥성했던 전문(前門), 등시구(燈市口), 지단(地壇), 성황묘(城隍廟) 등 지역의 도서 시장이 전부 유리창대가로 자리를 옮겼다. 한때 이곳은 묵향(墨香)이 그윽한 도서 시장으로 유명했다.

이렇게 유리창거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각지의 도서 상인들이 이곳에서 책을 팔고 가게를 차리며 서점을 경영했다. 당시 이 거리에 있는 다양한 책방들에서는 각종 서적과 과거시험 필수품을 팔았다.

지식인이 모인는 곳이면 자연히 그윽한 종이 냄새와 문화적인 운치가 더해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곳을 찾은 수많은 수험생들이 있었기에 유리창거리의 진한 묵향이 오래도록 전해졌다.

평범한 골목에서 유명한 도서 시장, 그것도 베이징성 최대 도서 시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이런 도서 시장이 흥성했기 때문에 나중에 입주한 서화 작품과 골동품 가게들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몇년이 지난후 도서 시장이였던 유리창거리는 점차 흥성한 골동품거리로 변신했고 도서는 이 거리의 일부분이 됐다.

민국 시기에 이르러 이 거리에 화평문이 세워지고 신화가(新華街)가 건설됐다. 신화가가 나타나면서 유리창거리는 지금의 모습처럼 동유리창(東琉璃廠)과 서유리창(西琉璃廠)으로 나뉘였다.

전한데 의하면 민국초기 이곳 골동품 가게들이 매우 흥성했는데 가게마다 유명 작가의 서화 작품을 소장하고 세상에 보기 드문 골동품을 보유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이것은 또 가게의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였다. 당시 희귀한 진품을 찾아 유리창대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야말로 성황을 이루었다.

요즘도 유리창대가는 문화적 매력이 여전하다. 그 열기가 전성시기에 비할수 없지만 현대적인 도심에서 베이징의 문화적 운치를 느낄수 있는 문화 명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번역/편집: 조옥단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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