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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예사후퉁(禮士胡同)
2016-09-08 16:24:55 cri


베이징 동성구(東城區)에는 지하철 남예사로(南禮士路) 역이 있다. 그 부근에는 좁고 깊은 골목이 있는데 바로 예사후퉁(禮士胡同)이다.

예사후퉁 그 이름만 들으면 우아함이 묻어나는 성구 예현하사(禮賢下士)가 떠오른다. 재능과 덕망을 갖춘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한다는 뜻이다. 하여 그 지명의 유래가 재능과 덕망을 겸비한 귀족집안 자제와 관련되지 않나 착각할수 있다.

하지만 그 진짜 유래를 보면 우아함과 거리가 멀다.

명나라때 이 후퉁은 노새와 당나귀를 팔던 시장이었다. 당시 노새 보다 당나귀 장사가 잘 됐던 터라 사람들은 당나귀 시장이라는 뜻의 '여시후퉁(驢市胡同)' 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여시후퉁이 예사후퉁의 본명이다.

당시 당나귀 시장 골목은 매우 흥성했다. 도처에 당나귀와 노새, 소, 말 등 가축이 묶어 두는 길고 짧은 말뚝이 세워져 있었다. 장사꾼들은 고객이 찾아 오기를 기다렸고 경험있는 고객들은 가축의 치아를 검사하며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거래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거래할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옷깃으로 손을 가리고 손가락으로 원하는 가격의 싸인을 보낸다. 이렇게 싸인을 서로 주고 받다가 적당한 금액에서 멈추면 바로 거래가 끝나는 것이다.

이밖에 가축 시장의 파생 '산업'이었던 편자를 박는 장사가 덩달아 흥성했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당나귀나 노새를 산 후 모두 편자를 박는 장제사를 찾았다. 하여 골목에 들어서면 도처에서 편자 박는 쇳소리가 들렸다.

전한데 의하면 당나귀 시장은 청나라 말기까지 존재했는데 선통(宣統) 연간에 이르러서야 가축 거래 시장이 철거됐다. 시장이 사라진 후 이곳 사람들은 후퉁 이름을 원래의 '여시후퉁'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한결 우하한 '예사후퉁'으로 개명했다.

한편 예사후퉁은 청나라 시기 재상이었던 류용(劉墉)이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건륭(乾隆) 연간에 류용은 시끌벅적한 당나귀 시장 후퉁에 살았다. 청나라 작가 진균(震鈞)은 <천지우문(天咫偶聞)>에서 재상 류용의 저택은 여시후퉁 서쪽에 있었고 골목 남북 양측을 차지했다고 기재했다.

그렇다면 나라의 재상이 왜 시끌벅적한 골목에 살았을까?

청나라 당시 한족 관리는 관직이 아무리 높아도 내성이 아닌 남성(南城)에 거주해야 했다. 류용의 아버지 류통훈(劉統勳)도 이 후퉁에 살았는데 그것도 황제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류통훈은 청나라 내각 대학사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후퉁 동쪽 입구에 있는 123번지는 청나라 대학사 애신각라 경신(愛新覺羅 敬信)의 저택이다. 애신각라 경신은 만족의 종실로 광서(光緖) 29년인 1903년에 체인각(體仁閣) 대학사로 임명됐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이 대학사는 내각 학사 겸 예부(禮部) 시랑(侍郞)으로 있었던 아들 묵기(墨麒)와 함께 생활했다. 하여 사람들은 대학사의 저택을 예사후퉁 묵가(墨家)라고도 불렀다. 현재 묵가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예사후퉁초등학교가 들어 앉았다. 당년의 학사 저택이 지금은 학교로 변신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작은 후퉁은 청나라 많은 대학사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사후퉁'이라는 지명이 이곳에 잘 어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의 예사후퉁은 예전과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녹음이 우거지고 골목 양측에는 재빛의 높은 담장과 주택이 늘어섰으며 고요하고 깊숙하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골목 북쪽 담장에서 10여개의 정교한 벽돌 조각을 찾아볼수 있는데 이것은 청나라 시기 조각이며 자금성에도 없는 희한한 물건이다.

하여 예사후퉁은 해마다 '후퉁문화전시회'를 가지고 이 후퉁에 살았던 역대 명인들과 후퉁의 변천사를 전시하고 있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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