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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현량사(賢良寺)
2016-11-18 13:10:00 cri

현량사는 일찌기 명나라 시기 부터 "십왕부(十王府)"로 유명했다. 청나라가 건립되면서 이곳은 왕족 관저가 됐으며 강희제(康熙帝)때는 13황자 윤상(胤祥)의 저택이었다. 옹정(雍正)황제가 즉위한 후 윤상을 이친왕(怡親王)에 봉하면서 이곳은 "이친왕부"라 불리기도 했다.

이친왕부는 원래 왕부정 동쪽의 수부원(帥府園)에 위치했으며 그 면적이 매우 컸다. <건륭경성전도(乾隆京城全圖)>기재에 따르며 왕부정 동쪽 거리를 마주하고 있는 일부 지역 외에 교위후퉁(校尉胡同) 서쪽과 금어후퉁(金魚胡同) 남쪽, 수부원후퉁 (帥府園胡同) 북쪽의 넓은 지역이 전부 이친왕부에 속했다. 하지만 현재 사찰 건축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 역사를 기억하는 지명만 남아있다.

애신각라(愛新覺羅) 윤상은 강희제의 열셋째 아들로 강희제 시기 조정에서 중용을 받지 못하고 조용히 지내다가 강희 말기에 있은 제위의 쟁탈(諸位之爭)에 연루돼 10여년간 감금됐다. 당시 옹친왕(雍親王) 윤진(胤禛)과 관계가 밀접했던 윤상은 윤진이 황위를 계승하고 옹정황제가 되면서 바로 화석(和碩)이친왕에 봉해지고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있다가 옹정 8년인 1730년에 세상을 떴다. 조정에서 8년간 그는 공로를 자처하지 않고 겸손하며 정성을 다해 황제를 보필했다. 옹정황제는 이런 윤상을 매우 아꼈으며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에 황제와 같은 윤(胤)자를 계속 사용할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이렇게 윤상은 옹정황제 시기 유일하게 황제와 같은 윤자 이름을 쓰는 황자가 됐다.

윤상이 세상 뜬 후 저택에 사찰을 세워달라는 유언에 따라 옹정8년 부터 4년간의 공사를 거쳐 옹정 12년인 1734년에 사찰을 건설했다. 그리고 옹정황제는 직접 "현량사"라는 이름을 하사했으며 <어제현량사비문(御制賢良寺碑文)>을 세워 윤상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현량사가 유명한 것은 두사람 때문이다. 한명은 앞에서 소개한 강희제의 열셋째 아들 윤상이고 다른 한명은 청나라 말기 대신 이홍장(李鴻章)이다.

현량사는 널찍하고 고요하며 마당에는 오래된 측백나무와 느티나무가 무성해 특히 여름철에 청량한 그늘을 이룬다. 또한 황궁과 가까이 있어 상경한 지방 관원들이 이곳에 거처를 잡았으며 강유위(康有爲), 심자배(沈子培), 왕병산(王病山), 좌종당(左宗棠) 등 많은 청나라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광서 26년인 1900년 경자지역(庚子之役) 당시 양광총독으로 있었던 이홍장은 팔국연합군과의 담판을 위해 광주에서 베이징에 들어와 바로 현량사에 머물렀다. 당시 베이징은 이미 팔국연합군의 통제를 받았고 현량사는 이홍장이 거처하고 있었기에 평화 담판을 하던 경친왕부와 함께 "청나라 정부가 관할하는 두개의 정원"이 됐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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