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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동화문(東華門)
2017-01-17 16:15:43 cri

 

동화문(東華門)은 자금성의 동문이다. 명나라 영락 18년인 1420년에 건설하기 시작한 동화문은 청나라 건륭(乾隆) 23년인 1758년 부터 군대를 사열할때 사용하는 면갑을 놓아두는 곳으로 이용됐다. 건륭 28년인 1763년 3월, 건륭 황제는 동화문밖 해자 부근에 있는 70개의 빈방을 궁내 환관들에게 공급하는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도록 명을 내리고 '은풍창(恩豊倉)'이라 이름했다.

자금성의 기타 3개 문과 달리 동화문은 태자궁인 육경궁(毓慶宮)과 가까웠기 때문에 황태자 전용 출입문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정덕(正德) 말년에 명무종(明武宗)이 황위를 흥헌왕(興獻王)의 장남에게 물려줬는데 바로 가경(嘉慶) 황제이다. 가경황제는 동화문으로 입궁하기로 한 예부(禮部)의 배치를 거절하고 대명문(大明門)을 이용했다. 그만큼 동화문의 급별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명영종(明英宗)의 '탈문지변(奪門之變)'이 바로 동화문에서 발생했다. 정통(正統) 14년인 1449년 7월, 몽골 오이라트부(瓦刺部) 두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했을 당시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은 환관 왕진(王振)의 부추김으로 직접 출정했다가 잡혀갔다. 역사적으로 이것을 '토목지변(土木之變)'이라 한다. 그후 명영종의 아우 주기옥(朱祁鈺)이 황위를 계승했고 명영종은 이듬해에 석방됐으나 태상황으로 높여불러 동화문 밖의 남궁(南宮)에 거처하게 됐다. 경태(景泰) 8년인 1457년, 경태제 주기옥이 병세가 위중해지자 무청후(武淸侯) 석형(石亨)이 환관 조길상(曹吉祥)과 부도어사(副都御史) 서유정(徐有貞) 등과 함께 영종을 다시 맞이하여 황제로 복위 시켰다.

정월 16일 저녁, 석형 등은 영종의 허락을 받고 즉시 움직였다. 당일 밤, 그들은 천여명의 군사를 장안문(長安門)에 잠복시키고 서유정 등이 남궁에서 영종을 구출했다. 영종은 동화문을 지나 봉천문(奉天門)으로 곧장 향해 봉천전(奉天殿) 어좌에 앉아 대신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서유정이 경태제를 기다리고 있던 대신들에게 태상황의 복벽을 선언했다. 이것은 무력으로 동화문을 강제 진입한 궁중 정변으로 역사적으로 '탈문지변' 또는 '남궁복벽(南宮復辟)'이라 한다.

청나라 초기 동화문은 오직 내각 관원들이 출입할수 있었다. 건륭 중기에는 연세가 높은 1품, 2품 관원들이 출입할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또한 청나라때 황제, 황후, 황태후의 관이 동화문을 통해 경산(景山) 등 지에 이송됐다. 하여 동화문은 민간에서 '귀신의 문', '음(陰)의 문'이라 불렸다.

자금성의 4개 성문중 오문(午門)과 신무문(神武門), 서화문(西華門)의 장식용 대못은 가로 9개, 세로 9개 총 81개이지만 동화문만은 가로 8개, 세로 9개로 총 72개 밖에 안된다. 하여 72는 음수(陰數, 짝수는 음수로 여겼다)이기 때문에 '음의 문'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동화문 대못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이렇다.

자금성 동, 서, 남, 북, 중 5개 방위 시스템 중 남북 중축선은 화생토(火生土), 토극수(土克水)의 관계로 오행의 운행에서 이런 관계는 집터가 길하다고 본다. 하지만 동서 중축선은 목극토(木克土), 토생금(土生金)의 관계로 집터가 불길하다고 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고대 건축가는 음양오행 상생상극의 원칙으로 목에 속하는 동화문의 대못수를 72개인 음수로 설계했다. 그것은 목은 토를 이기지만 음(陰)의 목은 양(陽)의 토를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대못수가 적어도 가로줄은 여전히 9개이기 때문에 황제의 존엄에도 손상주지 않아 교묘하게 문제를 해결할수 있었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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