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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장안가(長安街)
2017-01-17 16:27:56 cri

옛날 황성 정문인 천안문(天安門)밖 좌우 양측에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장안좌문(长安左门)과 장안우문(长安右门)이 있었는데 황성에서 내성으로 통하는 두개의 측문이었다. 장안우문과 장안좌문은 장치구안(長治久安, 장기간 안정되고 태평하다)의 의미로 장안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두문 사이에 있는 거리 장안가 즉 장안거리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아주 오래전 장안거리(长安街)는 원래 없었다. 원나라 시절 장안거리의 위치는 원대도(元大都)의 남부 성벽이었다. 명나라 초기 베이징성을 확장건설할 때 남부 성벽이 지금의 숭문문(崇文门), 선무문(宣武门)으로 이동하면서 원래 성벽자리가 동서방향의 거리로 되었으며 그 길위에 장안좌문과 장안우문 및 동단패루(东单牌楼), 서단패루(西单牌楼) 등을 세웠다.

명청시기 장안거리는 동쪽 동단(东单)에서 부터 서쪽 서단(西单) 까지로 전체 3.7km 거리고 십리장가(十里长街)라고도 불렀다.

장안좌문과 우문은 명나라 영락(永樂) 18년인 1420년에 건설하기 시작했고 모두 삼궐권문(三闕券門)으로 문턱은 한백옥으로 됐고 단층 팔작지붕에 황금색 유약기와로 건설됐다. 그리고 문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졌고 옛날 백관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야 했다. 장안좌문은 지금의 노동인민문화궁 정문앞에서 조금 동쪽으로 되는 곳에 있었다. 장안우문은 지금의 중산공원 정문앞에서 조금 서쪽으로 되는 곳에 위치했다.

지금의 모주석기념당에서 인민영웅기념비에 이르는 지역은 명청시기 천보랑(千步廊)이라 불렀다. 그리고 좌우 양켠에는 49개의 배조방(拜朝房)이 있었는데 문관은 서쪽, 무관은 동쪽의 순서에 따라 배치됐다. 즉 당시 중앙 행정기관 관원들이 사무를 보던 관공서가 집중된 곳이었다.

명청시기 전시(殿試)를 치른후 문부(文部) 관원들은 진사급제 명단을 적은 황제의 조서를 모시고 오문(午門)을 지나 천안문(天安門)을 통과해 장안좌문 밖에 걸었다. 과거에 급제한 서생들은 마치 용문을 넘어선듯 하다 하여 옛날 사람들은 장안좌문을 '용문'이라 불렀다. 또한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설에 따라 '청룡문(靑龍門)'이라 부르기도 했다.

장안우문은 호문(虎門) 또는 백호문(白虎門)이라고도 불렀다. 해마다 음력 8월 중순이면 황제가 파견한 형부 관원들이 대신들과 회동해 서쪽의 천보랑에서 '추심(秋審)'을 진행한다. 동쪽으로 부터 서쪽까지 가로로 몇십개의 큰 사각상을 배열하고 그 위에 붉은 주단을 편후 판관들이 북쪽을 향해 앉는다. 그리고 죄수들의 판결문을 서로 재심사한후 황제에게 올려 최종 사형 심판을 진행한다. 한편 조심(朝審)은 병정을 파견해 형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전부 압송해 장안우문에서 내려 정렬로 장안우문의 남쪽문으로 진입해 '조심' 심판석 앞에 일렬로 무릎을 꿇어 심판을 기다린다. 그리고 중죄범은 장안우문 배조방에 구류했다. 또한 동지 이른 아침이면 사형 죄수들은 사형장에 압송돼 참수됐는데 이때 장안우문을 지났다.

1912년 12월, 통행의 편리를 위해 장안좌문과 우문의 한백옥 문턱이 철거됐고 1913년 1월에 장안가는 정식으로 관통됐다. 그리고 장안좌문과 우문은 1952년에 완전히 철거된 관계로 지금은 옛날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찾아볼수 있다.

번역/편집: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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