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풀이
"万马齐喑" 이 성구는 일만 만(万)자에 말 마(马)자, 가지런할 제(齐)자에 벙어리 음(喑)자로 이루어졌다.
뜻풀이
여기에서 "喑"은 "(목이 쉬어) 말을 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말들이 소리없이 잠잠하다"는 말로서 침침한 정치정세를 비겨이른다. "만마가 다 울지못하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다"는 뜻이다.
유래
청나라(清代) 유명한 시인이며 문학가였던 공자진(龚自珍)은 근대자산계급 개량주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기도 했다.
인화(仁和—오늘의 절강성 휘주)사람인 그는 한 관료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서울에서 관직을 맡았던 사람들이었고 그의 어머니 단(段)씨는 유명한 한문학자(汉学家) 단옥재(段玉裁)의 딸이었다.
우월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남다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공자진은 27살 나던 해 향시에 급제한 후, 11년만에야 진사에 급제할 수 있었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릴때부터 사상을 속박하는 팔고문(八股文)을 싫어하여 현실을 떠난 문장을 짓기 꺼려했던 것이다. 그는 늘 나라를 일떠세우는데 필요한 학문에 대해 연구하기를 즐겼으며 이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어느 한번, 전시(殿试)에 참가한 공자진은 가장 먼저 답안지를 바쳤다. 시험을 잘 보았느냐고 묻는 벗들에게 공자진은 문장의 내용을 대체적으로 알려줬다. 그러자 벗들은 이번에는 반드시 수석으로 합격할 것이라며 공자진에게 미리 축하를 건넸다.
이때 공자진은 "그거야 청나라의 운명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지"라고 말했다. 그 뜻인즉 만약 시험관이 예리한 안목이 있다면 급제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청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이었다.
공자진은 절대로 말재주를 부려 환심을 사려고 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문장은 모두 민생에 관련된 의론이었는데 그중 서북지역을 개발하려는 생각은 가장 적절하고 실용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공자진은10년동안이나 서울에서 하찮은 관리직을 맡았다. 그동안 청나라의 부패함과 우매함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48세 나던 해, 년로한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광(道光)19년(기원 1839년), 공자진은 남하(南下)하던 도중 도합 315수의 7언절구(七言绝句)를 썼다. 그것을 정리하여 만든 책이 바로 "이해잡시(已亥杂诗)"이다.
그중 이렇게 씌어진 한수의 시가 포함되어 있다.
7월의 어느 여름날, 뜨거운 해빛에 공자진은 땀벌창이 되었다. 인적도 별로 없는 길을 걷고 있는데 먼발치에서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보니 고찰앞에서 한 도사가 한무리의 불교 신도들을 이끌고 옥황상제에게 바람과 비를 보내달라고 절을 하며 빌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공자진은 변혁을 일으켜 나라를 부강에로 이끌어야 한다는 상서를 몇번이나 조정에 올렸으나 번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일이 떠올랐다. 반드시 우수한 인재들이 나서서 개혁을 실시해야만 이러한 침체된 국면을 돌려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진은 가슴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개혁에 대한 열정을 담아 한수의 시를 지었다.
九州生气恃风雪
万马齐喑究可哀
我劝天公重抖擞
不拘一格降人才
공자진이 시에서 제기한 혁신에 대한 요구는 인민에 대한 희망을 나타냈을 뿐만아니라 이는 또한 자산계급 개량주의의 서곡이기도 했다.
"万马齐喑"는 바로 공자진의 이 시에서 유래된 성구로, 모두가 침묵을 지켜 분위기가 침울하다는 뜻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