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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후의 봉급은 얼마?
2010-05-28 17:56:33 cri

<홍루몽>에서 왕희봉은 "크면 큰만큼 어려움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통적인 대가정을 놓고볼때 경제란 번거로운 문제이며 천하 제일 가족을 이끄는 황제에게 있어서는 더구나 어려운 과제였다.

옛날 인원이 많은 후궁에서는 "큰솥밥"을 먹었다. 아무리 불룩한 돈주머니라도 무절제한 소비는 감당할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임금제를 실시해야 한다. 청나라때 후궁인원들의 임금은 궁분(宫份)이라고 불렀다. 즉 궁에서 나누어가지는 몫이라는 뜻이다.

그럼 궁분은 얼마나 됐을까? 역사자료의 기재에 따르면 부동한 등급에 따라 궁분도 서로 달랐다. 황태후의 궁분은 연간 금 20냥에 은 2000냥이었고 황후는 연간 은 천냥밖에 안돼 가련할 정도로 적었다.

현금 외에 또 실물임금이 있었는데 급별에 따라 받을수 있는 실물을 매우 상세하게 규정했다. 예를 들면 황후는 연간 장단(妆缎. 남경에서 만들어진 고급비단의 일종) 4필, 왜단(倭缎. 일본에서 생산된 비단, 후에 중국 복건성에서 모방해 만들어 왜단이라 불리웠음) 4필 등 여러가지 옷감을 받을수 있다. 신기한 것은 황후에게 매일 돼지고기 16근, 양고기 한접시, 작은 가축 두마리씩 배당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무우, 배추의 구체적인 량까지 명문으로 규정돼 있었다.

황후가 하루에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다. 옆에서 시중 드는 하인들도 같이 먹어야 한다. 청궁에는 수라간만 해도 백여곳에 달해 여러 궁들에서 나누어 음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황후의 식탁에 오를수 있는 음식량은 이렇게 규정돼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황후라 해도 음식이 모자라면 시종을 줄일수밖에 없었다.

자희태후의 음식상에는 한끼에 100여 가지 반찬이 오른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건 확실히 지어낸 말이 아니다. 그러나 자희태후도 가까운데 놓여진 반찬만 먹을뿐 다른 반찬들은 그냥 모양새를 갖출 뿐이다. 이미 쉬어버린 음식도 여전히 밥상에 오를때가 있었다고 한다. 부의황제때에는 이런 겉치레를 따질 형편이 안돼 황제, 황후와 왕비들이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먹었다.

청나라 황궁에서 수입이 낮았지만 황후는 시종을 두는 외에는 별로 소비가 없었다. 그러나 왕비는 상황이 달랐다. 권력이 높지 못하고 수입도 낮았기 때문에 내시를 챙기는데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잔꾀를 부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진비(珍妃)는 광서황제의 총애를 받는 대신을 이용해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관직과 작위를 팔았다. 호사경(胡思敬)의 <국문비승(国闻备乘)>에 기재된데 따르면 진비는 한번에 무려 4만냥의 뇌물을 받은 죄로 연금을 당했다.

그럼 무엇때문에 후궁의 임금이 이렇게 낮았을까? 이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제도를 세습한것과 연관이 있다. 명나라 주원장은 평민 출신으로 부정부패를 혐오했기 때문에 관원들의 저임금제를 실시했다. 명나라 말기에 가서는 심지어 황제가 대신에게 주는 장려도 값싼 물건들이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관원들의 임금이 매우 낮았던 것이다. 직원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니 경영자인 황제는 본보기가 돼야 했기 때문에 후궁의 임금도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그외 또다른 원인이 있는데 바로 경화의 부족과 관계된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모두 화폐를 발행했었는데 이는 정부에 톡톡한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전제정권으로서 이런 수단을 이용해 민간자본을 약탈하는 욕망을 억제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주원장도 지폐를 발행했는데 무절제한 발행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지나 다름없이 됐다. 화폐가 불안정적이면 유통은 백은과 같은 경화에 의지할수밖에 없다. 당시 중국은 은광자원이 제한돼 있어 화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백은을 다량으로 수입할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이 미국에서 약탈한 백은의 3/4이 중국에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화폐는 여전히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였다. 후궁에 배당되는 임금은 실물이 많고 경화가 적은 것은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저임금은 부패와 탐오를 막을수 없었다. 희귀자원에 속하는 권력은 꼭 기회를 찾을수 있다. 청나라 중기에 와서 수뢰행위는 거의 절반 공개화되다싶이 됐으며 심지어 대신들이 황제를 만나려고 해도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랜 시간 기다려야 되거나 심지어 만나지 못할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모른척 할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임금도 조상의 가법에 의해 규정됐기 때문에 환관에게 임금으로 지불할 더 많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환관들이 일에 대한 적극성이 떨어지면 황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편집: 안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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