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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원의 정수 "서양루"
2014-12-16 13:07:07 cri

이화원이 중국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중국의 대표적인 황실정원이라면 "세계정원의 극치"로 불리며 동, 서방 건축의 정수를 대표했던 정원은 원명원이다.

베이징 서쪽 교외, 이화원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원명원(圆明园)은 원명원(圆明园), 장춘원(长春园), 만춘원(万春园) 3원을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원명원은 1709년 강희제(康熙帝)가 네 번째 아들 윤진에게 하사한 별장이었으나 윤진이 옹정제(雍正帝)로 즉위하자 1725년 황궁의 정원으로 조성했고 그 뒤 건륭제(乾隆帝)가 바로크식 건축양식을 더하여 원명원은 동,서방의 건축풍격이 공존하는 "만원지원"으로 거듭났다.

1751년, 예술에 관심이 많던 청나라의 건륭제는 선교차 중국에 와 있던 이탈리아의 선교사인 카스틸리오네(1688~1766)와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미셸 브누아(1715~1774)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원명원 내 서양식 궁전의 설계도를 맡기게 된다. 이 다국적 건축물은 36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장춘원의 북쪽 일대에 자리 잡은 서양루(西洋楼)는 중국 최초의 유럽식 원림이며 오늘날 대외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으로 원명원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안타깝게도 건륭제가 아꼈던 서양루를 포함한 원명원 전체가 영, 프 연합군의 침입에 의해 대부분 소실되고 만다.

약 7만평방미터의 넓은 면적에 황화진, 해기취, 해안당 등 10여 개의 서양식 건축물과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던 서양루,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지만 15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화려한 서양식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다. 허나 지금은 석조잔해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어젯날의 화려함은 찾아 볼 수 없다.

(사진설명: 페허가 된 해기취 풍경)

 서양루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바로 해기취(谐奇趣)이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된 석조물들, 비록 눈앞에 보이는거라야 남아 있는 건물들의 잔해들이지만 애써 원래의 웅장함을 상상해 본다. 해기취는 1751년(건륭제16년) 가을에 지어진 최초의 유럽식 3층건물이다. 건물 앞에 좌우 9칸으로 된 활모양의 회랑이 2층짜리 누각과 연결되여 있었다고 한다.

해기취는 황제를 위해 중국과 서양 악기를 연주했던 곳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건물 남쪽에는 대형 해당식 분수지가 있는데 꼬리가 하늘로 치솟은 물고기조형물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동으로 된 양, 사슴, 거위, 오리 등이 조화를 이룬 분수가 있었다고 한다. 번미석어(翻尾石鱼)는 현재 북경대학 미명호(未名湖)에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서양루 황화진 풍경)

 해기취에서 옛날의 아름다움을 애써 상상으로 느낄 수 있었다면 남쪽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정자는 그 자체만으로 황홀하다.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정자의 정체는 바로 서양루 중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는 황화진(黃花阵)이다. 중국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잘 어우러진 정자 주위로 유럽의 미궁을 본 따 만든 미로가 펼쳐져 있다.

높이 1.2m, 동서 너비 59m, 남북 총길이 89m인 미로의 모든 벽을 합한 길이는 무려 1600m나 되었다고 한다. 이 곳도 역시 영.프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9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미로를 처음 걸어보는 사람들이 실제로 길을 잃고 당황해 하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옛날, 황제는 음력 8월15일 밤이면 이곳에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때 궁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손에 노란 비단으로 만든 연등을 들고 미로에 들어갔으며 가장 먼저 가운데 정자에 도착한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하여 노란색 연등이 가득한 진이라고 해서 황화진(黃花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얼핏 떠오른다.

(사진설명: 페허가 된 원영관 풍경)

원영관(远瀛观)은 건륭황제가 사랑하는 향비(香妃)를 위해 지어준 침궁이다. 3층으로 된 건물 내부에는 프랑스풍의 가구와 시계, 그야말로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하던 곳이였다고 한다. 건륭제는 향비를 총애해서 온갖 정성을 쏟았고 그 많은 후궁 중에 향비를 위해 건물까지 지어줬지만 그녀는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지금은 그런 화려한 옛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앙상하게 남은 기둥과 돌무더기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설명: 페허가 된 해안당 풍경)

원영관을 지나면 서양루의 건물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해안당((海晏堂)이 보인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만들어진 서양식 건물로서 해안당이 유명세를 탄 건 십이간지신상이라 불리는 분수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분수는 얼굴은 동으로 되어 있고 돌로 만들어진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12마리의 동물상인데 매일 각각 대표하는 시간대에 물이 분출되면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당시 중국과 서양문화가 결합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던 십이간지신상 역시 1860년 영. 프 연합군에 의해 동으로 된 머리는 약탈당하고 돌로 된 몸은 소실되었다. 그러다 지난 2000년 애국인사가 거액을 들여 소(牛), 호랑이(虎), 원숭이(猴), 돼지(猪)의 머리동상을 되찾은 희소식에 이어 지난해 프랑스인이 소장하고 있던 쥐(鼠)와 토끼(兔)머리동상을 베이징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처럼 문화재 반환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해안당에서 십이간지신상을 볼수 있는 날이 꼭 오지 않을까 싶다.

(사진설명: 원명원 대표 건물인 대수법)

원명원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전설속의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아치모양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보이는 대수법(大水法)분수지이다. 대수법은 석감식 건축양식으로 만든 건물이 배경인 멋스러운 분수로서 타원형으로 된 국화 모양의 분수 안에는 "10마리의 사냥개가 노루를 쫓는 모습"의 분수대가 있으며 좌우로는 13단계로 된 분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대수법까지 거닐다 보니 마치 유럽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국 전통정원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었고 당시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했었지만 현재는  역사의 무게를  새삼 실감케 한다. 

 

(사진설명: 황제 전용 대수법 감상석인   관수법)

대수법 바로 맞은편이 바로 황제 전용 분수 감상석인 관수법(观水法)이다. 감상석이라지만 어좌가 없기에 관수법에 앉아 대수법 분수를 감상하던 황제의 모습을 상상으로 만이 만날 수 있다. 관수법은 원래 중간 위치에 보좌가 설치되어 있고 그 뒤로 5개의 석조가 나란히 대형 석조병풍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서양루 유적지는 원명원 전체 면적의 1.5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서양루를 궁전의 하나로 이용할 만큼 서양의 신화와 문화까지 아우르는 중국의 포용력을 담고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화려했던 서양루의 건물 잔해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아마 화려했던 중국의 옛날을 상상하며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도 함께 하면서 말이다.

(사진설명: 페허가 된 서양루 건물과 남아 있는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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