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조황제
중화민족의 역사는 유구하다. 수천 년의 역사 흐름 속에 역사의 한 폐지를 수록할 많은 영웅호걸과 영재들이 나왔다. 그들 중에는 걸출한 정치가, 사상가, 군사가, 과학자, 문학예술가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들은 중국의 사회발전을 추진시켰으며 중국 문명발전사에서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하여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 영원히 빛 뿌리는 보석으로 되었다.
황제는 화하족(華夏族)이 형성된 후 줄곧 공인되어 온 시조 황제이다. 상고시대 희수(姬水) 일대, 지금의 섬감청 지구의 제가(齊家)문화구역에 비교적 선진적인 황제족이 형성되었다. 황제족은 시조인 황제의 이름을 딴것이다. 황제족과 강수(姜水), 지금의 섬서 기산, 무공일대에 자리 잡은 염제족(炎帝族)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통혼해왔다. 후에 황제족의 후예 중 한 씨족이 오늘의 산서 남부에 자리 잡고 하(夏)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씨족이름은 하족(夏族)이라고 했다. 하족은 중원에 진출해 중국의 첫 왕조인 하왕조를 건립했다.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 에는 황제 이름은 공손(公孫)이라고 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황제와 염제는 관중(關中)의 황토고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려족(九黎族)의 두령인 치우(蚩尤)가 이끄는 구려씨족은 산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후 황제와 염제는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염제는 하북에로 진출해 태행산 동쪽에 자리 잡고 황제는 하남에 진출해 숭산 일대에 자리 잡았다. 염,황,치우 3대 부족은 중원을 쟁탈하기 위한 고대 전쟁을 치렀다. 먼저 염제와 치우는 오늘의 하북과 산동, 하남 3성과 인접해 있는 황하 하류의 평원지역을 쟁탈하는 전쟁을 벌였다. 이 지역은 인구가 밀집하고 토지가 비옥하였는데 이 지역에 대한 쟁탈에서 치우족이 승리했다. 전쟁에서 패한 염제 신농씨는 부득이 북으로 피신해 황제의 원조를 바랐다.
치우는 대단한 인물로 기재되어 있다. 치우에게는 형제가 81명이 있는데 모두 사람 머리에 짐승 신체를 가졌고 얼굴엔 여러 가지 색깔로 문신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치우 형제들은 모래와 돌을 음식처럼 먹을 수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걸 보아 치우는 야만인의 두령이 아닌가 싶다. 치우의 구려부족은 염제와 황제의 부족에 비해 아주 낙후한 부족이었다. 구려부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황제와 염제는 돌도끼와 돌칼로 무장한 부족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범, 표범, 곰 등 맹수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황제와 염제가 지휘하는 맹수 이름으로 명명된 부대는 치우의 81명의 형제가 이끄는 부대와 탁녹에서 격전을 벌였다. 결과 치우가 이끄는 구려부족이 패해 치우는 목을 잘리고 그 부족은 전부 염황 부족에 편입되었다.
황제는 치우를 격파한 후 많은 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후에 염제족과 황제족은 충돌이 발생해 쌍방은 오늘의 하북 탁록현 동남부에서 맞섰다. 이 전투에서 황제족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부터 황제는 중원지구의 부족 연맹의 두령으로 되었다. 황제는 도읍을 유웅(有熊)으로 옮겼는데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황제의 명에 따랐다. 이때로부터 통일되고 평화적인 년대가 시작되었다.
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 정기적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심을 읽었다. 황제가 순회한 지역이 아주 넓다. 황제는 동으로는 랑아산과 태산에 올랐고 서쪽으로는 오늘의 감숙에 이르러 계두산(鷄頭山)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장강에 다달아 웅이산(熊耳山)과 상산(湘山)에 올랐다. 황제는 북쪽의 훈죽족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황제는 직접 군사를 휘솔해 가지고 훈죽족에 대한 징벌에 나섰다.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는 대발명가이다. 황제는 부족을 인솔해 가지고 중원을 개발하는 과정에 사람들의 수렵생활습관을 개변시켰다. 황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집을 짓고 정착해 가축을 기르고 농작물을 가꾸게 했으며 불로 밥을 짓고 익은 음식을 먹게 했다. 황제는 또한 수레와 선박 등 교통도구와 사람들이 입는 옷 등을 발명했다. 천하가 태평해진 후 황제와 그의 신하들은 많은 것을 발명했다. 황제의 황후 중 나조(螺祖)라고 하는 여인은 누에를 키워 그 실로 비단을 짜고 염색하는 기술을 발명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황제는 그의 사관(史官)들로 하여금 문자를 창조하게 해 원고시대 끈으로 사건을 기록하던 역사를 종말 짓게 했으며 악사들로 하여금 12개 음률을 만들어 내게 한 후 그 음률에 따라 12개 큰 종을 만들었다. 황제는 의사(醫師)인 기백(岐伯)과 함께 의학에 대해 토의했는데 "황제내경" 이 바로 황제와 기백이 의학에 대해 토의한 것을 기재한 고대의서라고 한다. 하여 후세 사람들은 중의학을 "기황지술(岐黃之術)"이라고 이름 지었다.
황제는 제후들을 통일한 후 국가를 창립해 중화민족의 민족혼으로 되었다. 사마천은 3대 천자와 서주(西周)의 제부들의 그 근원을 황제에 귀속시켜 중화민족 즉 황제자손이란 관념이 산생하게 했다. 황제자손이란 이 구호는 지금까지도 무한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다. 황제한테 패한 염제는 농군들에게 경작을 가르쳐 "신농씨(神農氏)"로 불리게 되었다. 염황도 황제와 함께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신을 가리켜 염황 자손이라고 떳떳하게 말하게 되었다.
황제는 중화민족이 인류문명사회에 진입하는데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황제 능은 섬서성 황릉현 현성에서 북쪽으로 약 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중화민족이 황제 능에 제를 지내는 행사는 춘추전국시대로 부터 시작되었다. 공자와 맹자의 글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쓴 글에서 황제 능 제사행사가 기재되어 있다. "려씨춘추. 안장편", "7국고", "산해경" 등 고서 기재에 따르면 "묘에 능원을 만드는 것은" 진나라부터 형성된 제도였다. 황제 능은 진나라시기 수건 되었는데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천자의 무덤을 일률로 능이라 명하고 서민들의 무덤은 묘라고 부르게 규정했다. 당나라시기 황제 능에 대해 2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수건을 진행했다. 송나라 개보(開寶) 2년에 황제 능을 교산 동악에 있는 황제행궁으로 옮겼다. 그 후 원, 명, 청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황제 능은 여러 차례 수건 되고 확건되어 지금의 규모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