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의 자는 자미인데 두소릉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두보는 하남성의 한 관료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13대 조부 두예는 서진의 명장이었고 조부 두심언은 무측천 시기의 저명한 시인이었으며 부친 두한은 연주사마와 봉선 현령을 지냈다.
두보는 당 왕조가 흥성하던 개원성세 때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공부하기를 즐긴 두보는 7살에 시를 읊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만여 권에 달하는 책을 읽어 시창작의 기초를 닦았다.
20살 후 두보는 서재를 떠나 10여년 간 산동, 산서, 하남, 하북 등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744년 낙양에서 시인 이백을 만나 형제의 정을 맺고 함께 시를 지었다. 평소 이백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두보는 이백을 따라 동으로 여행을 떠나 시인 고적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세상을 풍자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 두보의 시가창작에는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망악"을 들 수 있다.
두보는 "임금을 요순보다 낫게 하고 풍속을 다시 돈후하게 하리라."는 정치적 포부를 품과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때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두보는 조정의 실권이 간신인 이임보와 양국충의 손에 쥐여지고 "안사지란"이 한창 준비되고 있는 당시 정국에서 두 번이나 진사시험을 쳤으나 이임보의 작간으로 급제하지 못하고 근 10년 동안 근근득식하는 나날을 보냈다. 당시 두보의 생활은 너무 빈곤하여 귀족이나 고관대작들의 연회에 불려가 시를 지으면서 얻은 푼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극심한 생활고는 두보로 하여금 백성들과 접촉하고 백성들의 질고를 이해하고 통치계급의 죄악을 인식할 수 있게 하였다. 755년 "안사지란"이 일어나 안녹산의 군대가 장안을 함락했을 때 두보는 백성들과 함께 나라가 망하는 고통을 직접 맛보았다. 이로부터 두보는 백성과 나라의 운명을 우려하는 시인으로 되여 "병거행", "여인행", "영회오백자"등 사실주의 걸작을 써냈다.
두보는"영회오백자"시에서 "붉은 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시신이 널려 있구나."라는 구절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때로부터 두보의 시 세계는 가족과 개인의 안일을 도모하려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회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보다 폭넓은 내용을 갖추게 되였다.
두보는 당현종의 아들 숙종이 봉상에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홑몸으로 봉상으로 가서 좌습유라는 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목숨이 경각에 이르게 되었다. 강직된 두보는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 그는 애국적 정신이 강한 시들을 써내 사실주의 시 창작은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로는"비진도", "애강두", "춘망", "강촌", "북정", "삼리", "삼별" 등을 들 수 있다.
759년부터 두보는 10년간 사천, 호북, 호남 등지를 떠돌아 다녔다. 이 시기 두보는 천여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 전시기의 시에 비해 서정이 풍부해지고 형식이 다양해졌다. 그 중 대표작으로는 "모옥위추풍소파가", "관군이 하남, 하북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오랑에게", "세안행" 등이 있다. 이 시기는 당나라가 번영한 시기였다. 두보는 수많은 명산과 하천을 유람하고 지식을 늘이고 시야를 넓혔으며절정에 올라야만 모든 산을 굽어볼 수 있다.란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두보는 770년 겨울 장사로부터 악양으로 가는 배우에서 "싸움터에서 피는 그냥 흐르고 함성은 그침 없구나."라는 시구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두보는 어릴 적부터 유가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나 유가사상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뜻이 펴이지 않으면 제 한 몸 잘 살펴야 하고 뜻이 펴이면 천하를 고루 구제하여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에서 벗어나 모진 생활난에 쪼들릴 때도 천하와 백성들을 구제할 뜻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시로써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고 당시의 부패한 정치를 규탄하고 고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동정하였다. 그는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 "신안리(新安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 시에서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깊은 동정과 전쟁에 대한 증오를 보여주었다.
"삼리", "삼벌"시에서 두보는 불합리한 병역제도를 규탄하면서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깊을 동정을 표시하였으며"영회5백자"에서 두보는 백성들이 귀족, 벼슬아치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오는 두보의 시는 1400여 수나 된다. 그의 시는 당조의 흥성으로 부터 쇠망에로 전변하는 역사적 과정을 잘 보여주었기에 그의 작품은 "시사"로 불린다. 두보가 시로 묘사하는 제재는 광범위했고 그 시들의 풍격과 기교 또한 변화무쌍하다. 그의 시는 형상적 미를 갖추고 있을 뿐더러 음악적 미도 갖추고 있다. 그의 시는 "시경"이래의 우수한 문학전통을 계승하여 중국의 고대 시가의 사실주의 고봉에 올랐으며 그 후의 시가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시성"이라 하여 "시선"이백과 함께 대시인으로 추앙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