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秦始皇)은 조(趙)나라의 대상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기원전 259년에 태어나 13세에 즉위하였다.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 한, 위, 조, 초, 연, 제 나라 등 6국을 정벌해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으며 스스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진시황은 봉건제를 폐지, 천하를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는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여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체제 왕국을 세웠다. 진시황은 또한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진시황은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은 문자도 통일시켰다. 전국시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으로 된다.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 즉 바퀴 폭을 통일한 것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진시황은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그후로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진시황은 북부지역 소수 민족들의 잦은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수축했으며 상업을 장려하고 남서부로 원정을 벌여 진의 통치영역을 서남부, 동남 연해지방, 주강(珠江)이 흐르는 광동성까지 넓혔다.
진시황은 중국역사의 위대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그의 폭행은 공적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사에 기록되었다. 만리장성의 구축은 당시 인력과 물력, 과학기술수준의 제한으로 거액의 자금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사상자를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은 또한 토목공사를 크게 벌려 호화로운 궁전아방궁과 자기의 능을 구축했다. 지금 만리장성과 서안의 진시황 능 병마용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었다.
진시황의 다른 하나의 폭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사상적으로 전제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 진시황제는 궁중에 소장한 "진사"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역사책과 유가경전을 전부 소각할 것을 명했고 지어는 이런 경전을 소장하거나 전파하는 학자들을 생매장했다.
진시황은 통일 11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했는데 이후 진나라는 기원전 202년에 농민봉기로 멸망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시킴으로써 중국역사의 장기적인 분열 국면을 결속 지었으며 한민족을 주체로 한 강대한 다민족 봉건제국을 창건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