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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초창기편
2010-05-19 09:04:33 cri

올해 7월 2일로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개국 6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듬해인 1950년에 고고성을 울린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은 중국국제방송국에서 일본어, 영어, 윁남어, 타이어, 인도네시아어 다음으로 7번째로 개국한 언어방송입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 초창기 멤버의 한분인 송진명선생에 따르면 방송 개국 당시 방송여건이 매우 어려워 조선어방송부의 재산이란 방송일군 4명의 책상 4개와 책상위에 놓인 2인용 탁상등 하나, 원고지, 철사서류함, 그리고 일본어방송일군들이 사용하는 고물같은 진공관라디오 한대가 전부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중국 중앙방송사업국(현 중국 라디오 영화 및 텔레비전 방송 총국)은 1950년대 초부터 대외 조선어방송 개국을 추진했고, 1950년 4월 10일에 시험방송을 마친 후 10월에 정식 개국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6월 25일에 조선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정세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자 원래의 계획보다 석달 앞선 7월 2일에 첫 전파를 날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방송방침은 <모든 것은 항미원조를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여 방송내용은 항미원조에 관한 보도와 중국인민지원군사령부의 전과보도, 항미원조에 관한 <인민일보>의 사설과 신화통신사의 국제논평, 미제의 침략만행을 폭로하는 내용과 중조친선을 담은 내용들이 위주였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항미원조운동과 생산복구와 관련된 경제보도도 방송되었습니다.

조선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어방송은 1951년 초부터 방송시간을 하루 반시간으로부터 1시간으로 늘려 조선전쟁의 전과를 제때에, 보다 자세하게 청취자들에게 통보했습니다. 그때 연변방송국의 초대 방송인들이 합세하면서 조선어방송 대오도 다소 확대되었습니다. 당시 방송인들은 경험이 적었지만 방송사업에 큰 열성을 보였습니다. 녹음실이 보잘것 없고, 녹음설비도 변변치 않은 낙후한 조건에서 방송원들은 고정프로와 음악프로만 사전에 녹음하여 녹음방송을 했을뿐 뉴스는 전부 생방송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초창기 방송인들은 성스러운 사명감을 안고 밤낮없이 방송기량을 높이기 위한 훈련을 다그쳐 빠른 시일내에 순조롭게 생방송을 담당할수 있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이련숙 아나운서의 소개에 따르면 그때 아나운서들은 녹음실에 들어가 방송을 하기 전에 원고를 <20번 읽기운동>을 했으며 적어도 뉴스방송 전에 10번은 읽어서 줄줄 외울수 있을때 방송을 했습니다. 한번은 방송국에서 만자를 번역, 방송하는데 하나의 오역, 오독도 허용하지 않는 <1만자 돌파운동>을 가졌는데 조선어방송부에서 단연 1등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청취자들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을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방송", "친선을 꽃피우는 목소리"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이 개화기에 들어선것은 조선반도에서 정전이 실시된 1953년 후부터였습니다. 1953년부터 조선어방송은 단순한 뉴스와 논평 등 정치적 내용위주의 프로방식에서 대양한 프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방송업무도 번역위주에서 취재, 방송드라마제작, 실황방송 등 영역에로 확대되었습니다. 1953년 1월, 조선철도예술단의 중국방문기간 조선어방송은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모주석과 주은래총리, 주덕 총사령관을 비롯한 당 및 국가지도자들이 관람하는 조선철도예술단의 공연을 취재 방송했습니다. 그후 1958년에 조선어방송의 초창기 원로인 김성철 조장이 중앙인민방송국 군사조 기자와 함께 조선을 방문해 군사취재를 진행하면서 조선어방송의 첫 외국취재가 이루어졌습니다.

1959년 6월부터(1967년 1월까지) 중조 두나라 방송기구인 중국방송사업국과 조선중앙방송위원회가 체결한 방송협정에 따라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조선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30분간의 교환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방송했습니다. 조선어방송의 교환프로그램에는 고정프로그램 <여기는 북경입니다>가 있었는데, 조선중앙방송은 매주 화요일마다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조선 전국에 방송했습니다. 이 프로는 보통 2~3편의 뉴스와 여러가지 쟝르의 방송기사들, 이를테면 녹음보도, 문학작품, 음악 등 내용으로 구성되여 있었고 조선어부 기자들이 취재 작성한 대상성있는 녹음보도가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교환프로그램들은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다양해 조선청취자들의 <기다려지는 프로>로 인기가 대단했으며, 교환프로그램을 청취한 후 청취자들이 보내온 편지는 한달에 몇천통에 달해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역사에서 지금도 여전히 최고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속에서도 조선어부 방송일군들은 방송분야의 맡은바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여 모든 면에서 항상 중국국제방송국의 앞자리를 차지했을뿐 아니라 여러분야에서 활약하면서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중앙방송사업국과 외교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의 외사부문들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당과 국가지도자들이 김일성수상을 비롯한 조선 당 및 정부 대표단들을 접견하거나 외교행사가 있을때 주로 국제방송국 조선어부의 통역을 초청해 갔습니다.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의 초창기라고 할수 있는 20세기 50년대, 비록 방송실무를 제고하려고 해도 사전이나 자료라고는 조선에서 출판된 <조선어사전> 한권과 <옥편>한권, <로동신문>밖에 없었지만 조선어방송에 몸담은 노일대 방송인들의 피타는 노력과 고도의 책임감, 성스러운 사명감,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 끊임없는 실천은 초창기 조선어방송이 개화발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 대외방송 역사의 빛나는 한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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