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1960년대에 들어서며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성숙일로를 달리었습니다. 1960년부터 특정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예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당신은 아십니까?"를 비롯한 고정프로가 방송되었습니다. 조선반도에서 저지른 미제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방송이 나가자 많은 청취자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이 일어났습니다. 청취자들은 편지에서 "북경조선어 방송은 아주 정확하고 예리하다. 방송이 참 들을 맛이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때 남조선에서는 "북경조선어 방송을 듣지 않고는 발언권이 없다"는 말까지 전해졌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어 방송이 더욱 확대발전됨에 따라 중앙인민방송국 소수민족어 방송부와 연변조선족 자치주로부터 한창희, 리성호, 전숙자, 윤봉현, 장원천, 김춘선, 신정자 등 임직원들이 선후하여 보충되었습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지난 60년간의 발전노정에서 중국의 대외방송을 위하여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1960년 4월, 남조선의 마산시를 비롯한 전 지역에서 리승만 독재를 뒤엎기 위한 기세 드놓은 국민 항쟁이 벌어졌습니다. 4월28일 오후, 수도 베이징의 각계 인사 60만명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남조선인민들의 정의의 애국적 투쟁을 지지성원하는 성대한 집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앙인민방송국과 중앙텔레비젼 방송국이 대회 실황을 중계 방송하였고 중국국제방송도 대회실황을 중계방송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네 시간 정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의 준비를 거쳐 리련숙, 박창식 등 방송일군들이 평소에 연마한 기량으로 대회 연설문들을 현장에서 번역하면서 현지실황방송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는 중국국제방송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실황중계 방송으로서 중국국제방송국 역사에 빛나는 한폐지를 기록하였습니다.
1966년12월15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조선어방송시간을 원래의 매일 2시간으로부터 4시간으로 늘였으며 방송대상지역도 조선반도 전역으로 넓혔습니다. 방송시간이 늘면서 업무량이 많아지고 그만큼 힘들었지만 전체 임직원들이 일심협력하여 좋은 방송을 만들어나갔습니다.
1970년에 모택동 주석은 조선의 박성철 외무상을 만난자리에서 조선의 언어전문가를 중국국제방송국에 파견해 줄것을 부탁했습니다. 하여 1971년 3월부터 조선에서 언어전문가를 조선어부에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초에 연변각지와 길림인민방송국으로부터 많은 방송일군들이 전근되어오면서 조선어방송대오가 크게 확대되고 역량도 강화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국제방송국에는 자립적인 시사정치보도부가 없었습니다. 1978년5월, 그 당시 당과 국가 최고지도자의 조선방문을 계기로 중앙인민방송국과 중국국제방송국에 2명의 수행기자 명액이 내려왔습니다. 중국 라디오 및 영화 텔레비죤 방송부 장향산 부장은 이 과업을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에 맡겼습니다. 당시 조선어부의 한창희와 장원천은 한어와 조선어로 최고지도자의 조선방문행사를 현지녹음으로 제때에 보도하였습니다. 그번 수행취재는 중국국제방송국 사상 처음으로 되는 중국지도자의 출국방문 수행취재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중국 당과 국가지도자들의 출국방문때마다 중국국제방송국이 수행기자 명액을 가지게 되었고 또 이것을 계기로 중국국제방송국은 독자적인 시사정치보도부를 내오고 조선어부서도 그 후 시사정치보도기자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강택민, 리붕, 양산곤, 리선념, 팽진 등 중국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조선과 한국을 방문할 때와 김일성, 리종옥, 연형묵 등 조선의 당과 국가지도자들이 중국을 방문할때, 그리고 한국의 로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때 박창식, 장원천, 윤봉현, 백일승 등이 정치보도기자로서 선후하여 수행취재를 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조선어방송부문들중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기자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중앙지도자들을 수행취재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