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조선어방송 60주년을 맞으면서
올해 7월 2일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 개시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60년 전의 그 여름날부터 우리의 몇세대 선배방송인들은 대외조선어방송이란 이 신성한 일터에서 자기의 청춘과 모든 지혜를 다 바쳐왔고 조선어방송의 지속적인 발전과 비약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겨왔다. "중국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를 중국에 알리며 세계에 세계를 알린다."는 중국국제방송의 취지에 걸맞게 대외조선어방송은 중국과 조선반도 사이에서 "친선의 목소리"로, 중국을 알리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다.
60년의 세월속에 조선어방송은 힘겨웠던 창업단계에서 안정단계로 그리고 또다시 전면적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거쳐왔다. 이 60년은 대담한 혁신과 도전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전의 길을 탐색해온 세월이였다. 이제 조선어방송은 더 큰 무대를 향해, 더 밝은 래일을 향해 비상의 날개를 펼칠것이다.
자랑스런 대외조선어방송인들
1950년, 나라에서는 년말전으로 조선어방송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에 따른 준비작업이 진행되고있었다. 년초부터 인원모집이 진행되였고 4월에는 시험방송에 돌입했고 정식방송 예정날자는 10월로 잡혀졌다.
그러나 6월 25일, 조선전쟁이 발발하면서 계획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고 당시 정세변화의 요구에 따라 조선어방송은 예정보다 3개월 앞당겨 7월 2일 첫 전파를 날렸다.
개시 당시 편집, 방송원은 단 4명뿐이였다. 지방부문과 군부대에서 온 김성철, 송진명, 안광수, 리호원이 조선어방송의 "개국원로"로 되였다. 이해 년말에는 또 연변인민방송국으로부터 리성삼, 리련숙, 림영춘 등 방송원, 편집원들이 속속 조선어방송에 합류했다. 1951년에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부국장으로 있던 박세우가 전근되여왔고 조선중앙방송의 아나운서 김봉직, 전순덕이 조선어방송에 파견돼 1953년까지 아나운서로 있다가 귀국했다.
이 시기 인원류동도 심했으나 몇년간의 실천속에서 주요인원들이 성장했고 조선어방송도 자체의 독특한 풍격으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개시 당시 조선어방송은 하루 30분 방송을 했다. 당시의 중조관계 및 조선전쟁의 특성상 방송방침은 "모든것은 항미원조를 위해 복무하는것"이였고 방송내용도 항미원조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의 원로들은 대부분 타직종에서 일하던분들로 방송경험, 특히는 대외방송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방송에 필요한 서적들과 자료들도 판부족이였다. 원로들의 회상에 따르면 개국 초기 조선어부의 "재산"이란 책상 네개, 중조사전 한권, 옥편 한권 그리고 ≪로동신문≫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에 대한 사랑과 애착만은 모두가 대단했고 그 기량도 빨리 늘어 방송수준이 일취월장했고 청취자들로부터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방송", "친선을 꽃피우는 방송"으로 불리웠다.
전반 1950년대는 조선어방송의 격변기와 창업기라고 할수 있다. 당시 갓 창건된 중화인민공화국은 모든 부문들에서 인재들을 수요하던 때였고 따라서 인원류동도 심했다. 초창기 조선어방송의 근무자들중 2~3년간 몸 담고있다가 다시 지방이나 다른 부문으로 전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전쟁이 끝난후 조선어방송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다. 1953년, 연변인민방송국과 중앙민족학원으로부터 김일, 류운섭, 김창활, 황옥금 등이 조선어방송의 새 식구가 되고 이어 1956년에는 박창식, 량윤철, 김대관 등이 새롭게 입사했다.
1950년대의 힘겨운 초창기가 지나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조선어방송대오가 안정적으로 확대, 발전했으며 방송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1966년에는 조선어방송시간을 네시간으로 늘였고 대상지역도 조선반도 전반으로 확대되였으며 따라서 방송내용도 크게 풍부해졌다. 중국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프로들이 인기를 누렸고 1959년부터는 조선중앙방송과 프로그람교환을 진행, 매주 30분 편성으로 우리의 방송내용이 조선중앙방송의 전파를 타게 되였다. 교환방송의 취재, 편성, 제작을 위해 도원제, 리병성, 길문도 등 중문편집들이 입사하게 되였다. 이 프로그람은 조선청취자들중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매달 몇천통에 달하는 청취자 서신을 받았다.
1960년대에 입사한 한창희, 리성호, 전숙자, 윤봉현, 장원천, 김춘선, 신정자 등 인원들과 1970년대 연변, 길림 등 지구에서 온 서창술, 김태근, 리정옥, 왕덕문, 안옥화 그리고 길림인민방송국 등 단위에서 전근되여온 최영수, 한정숙, 김희남, 조선에서 귀국한 마걸 등 인원들이 대량 보충되면서 조선어방송은 인원대오가 더욱 확대되고 여러가지 다양한 프로들을 편성, 제작할수 있는 수준과 능력이 한층 제고되였다.
이전 세대들이 다른 방송사나 문화부문 등에서 전근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1980년대 이후부터는 대학졸업과 함께 방송국에 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1980년대에는 연변대학, 중앙민족학원(지금의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박은옥, 백일승, 리선옥, 박명국, 김호림 등이 합류하고 1990년대에는 김금철, 김철, 김동광, 주정선, 리명란, 조설매, 한경화 등 새로운 "피"들이 수혈되였다. 선배방송인들이 마련한 탄탄한 기틀은 새로운 일대들이 자기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주었고 조선어방송도 점점 국제방송국 나아가서 전국 조선어방송계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굳혀나갔다.
1997년, 중국국제방송국은 석경산구에 위치한 새 사옥으로 이전하고 방송도 제작에서 송출에 이르기까지 재래식아날로그에서 디지털방식으로의 력사적인 전변을 이루어냈다.
1999년은 조선어방송이 수도지역 FM방송 개국, 온라인방송을 시작한 특기할만한 한해였다. 이때로부터 무선방송과 인터넷방송이 점점 밀착되고 청취자와 네티즌들의 분포범위, 방송청취방식, 방송참여형식 등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런 변화의 추세에 발맞춰 2000년대에 들어선후 새로운 사유,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이 조선어방송에 몸을 담그게 되였다. 2000년에는 김민국, 림봉해, 한창송이 입사하고 2005년에는 송휘, 리준 등이 합류하는가 하면 인터넷전문팀의 신설로 안광호, 박선화, 리연, 림해숙, 조옥단, 석봉삼 등이 새로 입사했다.
조선어부의 "진기록"들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외조선어방송은 여러가지 기록들을 남겼다. 리정표적인 의의를 가지는 이런 사건들을 되돌아보노라면 우리 방송인들의 대담한 도전과 혁신 정신을 페부로 느낄수 있다.
조선어방송의 첫 현장생중계는 1960년 천안문광장에서 진행됐다. 당시 리승만독재를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성원하는 수도 각계 군중 대규모집회가 천안문광장에서 열렸고 조선어방송은 이를 현장중계하라는 과업을 맡게 된다. 행사 시작 4시간 전에 생방송결정이 내려졌고 현장 연설문들을 손에 쥐지 못한채 60만 군중이 운집한 대형행사를 생방송으로 내보낸다는것은 지금 생각해도 긴장해진다. 조선어부는 방송원 리련숙, 번역편집 박창식 등 로련한 방송, 편집 인원들을 파견했고 이들은 현장에서 침착하게 번역, 방송을 해가면서 전반 행사의 실황방송을 성공리에 마쳤다. 그번 방송은 조선어방송의 대형행사 실황중계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1978년, 당시의 중국 최고지도자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였고 중국국제방송은 두명의 수행기자를 파견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조선어방송의 한창희, 장원천이 대표단 수행기자로 파견되였고 이들은 바쁜 일정속에서 여러가지 취재임무들을 훌륭히 완수했다. 이는 국제방송이 시사정치보도부를 두게 되는 계기로 되였고 조선어방송도 전문적인 시사정치보도기자를 두게 되였다. 장원천, 윤봉현, 백일승이 선후로 시사정치보도기자를 맡았고 중국지도자들의 조선, 한국 방문과 조선, 한국 지도자들의 중국방문시에 수행취재를 해왔다. 이런 수행취재는 조선어방송의 업무범위의 확대라는 큰 의미속에 지도자방문이라는 중요한 취재를 위한 소중한 경험이 되였다.
스포츠실황방송은 생방송중의 "꽃"으로 불리운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은 조선어방송의 스포츠중계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윤봉현, 김태근 두 방송원은 방송국 내부 선발에서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고 훈련과정을 거친후 아시안게임의 스포츠중계석에 앉게 되였다. 이들은 축구와 배구, 롱구 등 종목의 관건적인 경기현장에서 재치있는 방송진행과 격정 넘치는 해설로 청취자들에게 "청각의 향연"을 선물했다. 이들의 생방송은 청취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였고 관련 부문들로부터 여러차례 표창을 받았다. 이는 조선어방송의 첫 스포츠실황중계였고 지금까지도 후배방송인들이 "넘기 힘든 산"으로 남아있다.
조선어방송프로 수상경력중 1994년에 제작한 새해맞이특집방송은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백일승, 윤봉현이 기획, 연출하고 김태근, 김춘선이 사회를 맡은 이 프로는 조선과 한국의 연예인, 청취자들이 방송프로에 참여하고 우리 방송이 이들을 위한 만남의 장, 친선의 가교를 제공했다는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 프로는 중국국제방송프로평의 1등상, 전국방송 2등상이라는 영예를 따냈고 청취자들이 보내준 편지수도 개혁개방이후의 최고기록을 창조했다. 지금까지 조선어방송은 국제방송국 내부의 대상은 물론 전국조선어방송우수프로평의, 전국조선어방송원사회자평의, 서울프라이즈 등 국내외 프로평의에서 여러차례 큰 상들을 받았다.
1996년 3월, 중국국제방송국은 서울에 지국을 설립했고 이때로부터 조선어방송부에서 주재기자를 파견하게 되였다. 초대 서울주재 기자로 장원천이 파견되였다. 그후 박명국, 김태근, 김동광, 김금철 등 기자들이 선후로 해외파견근무를 했고 현재는 김민국기자가 특파원으로 활약하고있다. 특파기자 파견은 조선어방송부의 활동무대를 크게 넓혀주었고 현지 방송, 문화기관들과의 협력관계를 더 긴밀히 해주었으며 우리 방송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있다.
새로운 도전 그리고 우리의 길
60년의 발전을 거쳐온 조선어방송은 현재 본 방송 2시간, 재방송 2차로 하루에 총 6시간 방송된다. 조선반도에 중파, 단파로 방송됨은 물론 하와이지역 FM에 1시간, 연길아리랑방송에 1시간 방송되고 연대인민방송을 통해 뉴스를 방송하고있다. 현재 조선어방송부의 인원수는 26명으로 오랜 년륜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로일대들과 젊음의 패기로 넘치는 새세대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더 좋은 방송프로를 만들어가기 위해 진력하고있다. 조선어방송의 무대도 점점 넓어지고있다. 올림픽, 공화국창건 경축행사, 상해엑스포 등 굵직굵직한 행사의 현장에서 생방송과 취재에 나서고있고 적시적이고 정확한 보도,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프로들을 대량 제작하고있다.
방송의 특색을 살려주는 현지실황중계방송도 이제는 1년에 몇차례씩 진행하군 한다. 해마다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년례회의 개막식생방송을 정기적으로 해오고있고 체육대회 개막식과 같은 중요행사들을 수시로 중계방송하고있다. 2009년 공화국창건 60주년 때는 천안문광장에서 진행된 열병식과 군중축하시위를 라지오방송, 인터넷동영상, 인터넷문자와 사진 생중계 등 세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중계함으로써 조선어방송 실황중계의 새 력사를 쓰기도 했다.
조선어방송의 청취자수도 확대일로를 걷고있다. 현재 조선어방송은 한국과 조선, 국내의 연변과 장춘 등지에 청취자클럽을 두고있고 청취자와의 만남행사도 갖는다. 열성청취자군체가 형성되였고 청취자, 네티즌들의 프로참여도가 높아 방송프로의 다양화, 상호 소통과 련동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고있다. 이들을 위해 조선어방송은 "청취자의 벗" 프로를 장기간 진행해왔고 2005년에는 "청취자의 벗" 계간지를 창간했다.
조선어방송의 국내외협력도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와는 장기간 전문가파견, 실습생교류, 상호 방문 등 내용으로 협력해왔고 한국 KBS와는 인원양성, 연수, 공동프로그람 제작 등 업무협력을 해오고있다. 또 연변, 연태 등 지역과는 방송중계, 련합취재 등 제휴관계를 맺고있다.
발전과정에는 언제나 새로운 문제, 새로운 도전에 부딪치게 된다. 부동한 사회제도와 가치관을 가지고있는 한국과 조선 청취자들이 모두 애청하는 대외조선어방송을 만들기 위해 선배방송인들은 많은 노력을 경주해왔고 이제는 우리가 그 "숙제"를 풀어나가고있다.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청취자들의 곁에 다가가는 방송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2009년부터 조선어방송부의 업무중점은 기존 전파방송을 잘하는 기초에서 온라인방송으로 넘어갔다. 이는 멀티미디어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전략적인 변화이고 조선어방송의 더 큰 도약을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무한경쟁시대의 신흥 미디어들과 맞서야 한다는 새로운 도전도 제기되였다. 경쟁과 도전을 이겨나가는 길은 변화하는 추세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로 부단한 변화를 시도하는것이다. 이는 새 세기 우리 방송인들이 해야 할 몫이고 또 우리는 해나갈것이다.
대외조선어방송 60년 동안 끈끈히 이어져내려온 맥은 우리 방송인들의 대담한 도전정신, 과감한 혁신정신이였다. 이는 소중한 재부이고 우수한 전통이다. 바로 이런 문화가 조선어방송을 이끌어왔고 또 향후 발전을 힘있게 이끌어갈것이다.
노력과 도전 그리고 영광으로 점철된 60년의 묵중한 력사는 새세대 대외조선어방송인들의 자랑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수 있는 신심의 원천으로 된다. 이제 우리는 선배들의 계주봉을 이어받아 대외조선어방송의 새로운 60년 력사를 써나가야 한다. 새 시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우리 방송인들은 더 투철한 직업정신과 열정 그리고 선배들이 물려준 과감한 도전과 혁신 정신으로 대외조선어방송의 더 찬란한 래일을 열어나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