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우는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부 초대 주임, 조선어방송 초창기의 가장 대표적인 방송인, 조선어방송사의 명실상부한 원로이다.
조선어방송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세우는 1947년 연길에서 방송계에 입문해서부터 1989년 중국국제방송국에서 방송생활을 접기까지 42년이란 묵직한 방송경력을 소유하고있다.
전쟁의 나날
박세우는 1928년 12월 연길시에서 태여났다. 1936년, 약제사였던 아버지가 페염으로 돌아가시자 박세우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생활고를 겪었다.
1947년, 박세우는 4년제 연길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전쟁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항일민주련군에 입대하였다. 그때 졸업반의 60여명 열혈청년들이 모두 따라나섰다. 해방전쟁과 조선전쟁을 거치면서 이 60여명 동창생들은 단 몇명외 모두 희생되였다.
박세우는 입대하자마자 길림군구사령부 정보처에서 활약했다. 1947년 12월, 길림시가 해방되자 군구사령부는 길림으로 들어가고 박세우는 계속 연길에 남게 되였다.
아나운서의 길
1943년 15살 나던 해, 방송국에서 기술자로 있던 친구 형님의 "한번 놀러오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박세우는 방송국을 찾아갔다. 박세우는 그 걸음이 자신을 방송인의 길로 이어주는 계기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는 일제통치시대라 방송국은 아무나 드나들수 있는 곳이 아니였다. 방송국에 들어선 박세우는 눈앞의 광경에 절로 탄성을 터뜨리며 한동안 넋을 잃고말았다. 처음 보는 미국제 큰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아나운서의 방송모습…모든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뒤로 박세우는 방송에 큰 흥미를 갖게 되였고 평소에도 틈만 나면 소리내여 랑독도 하고 평양과 서울 방송을 들으면서 아나운서들의 방송진행을 흉내내기도 하면서 방송인으로서의 수련을 쌓아갔다. 이리하여 1947년에 연길에 남게 된 박세우는 연길신화방송국에 입사하면서 끝내 아나운서의 꿈을 이루게 되였다.
연길신화방송국은 1937년 4월에 괴뢰만주국이 연길에 최초로 세운 방송국이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쏘련홍군과 현지 인민들의 보호로 방송국은 원 상태를 보존할수 있었다.
1946년 8월, 연길로 근거지를 옮긴 중공 길림성위와 길림성 정부는 방송국을 접수하자 "연길신화방송국"으로 개명하였다. 연변인민방송국의 전신인 연길신화방송국은 "연안신화방송국"에 이어 해방구에 비교적 일찍 세워진 방송국중의 하나이다. 그 당시 방송내용은 전과(战果)보도가 첫순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어서 연변소식을 망라한 국내 소식들이 방송되였다고 한다.
연길신화방송은 중국어와 조선어 두가지 언어로 방송을 했는데 중국어방송은 섬북(陕北)인민방송을 중계하였고 조선어방송은 동북조선인민보(1955년 ≪연변일보≫로 개명) 조문판의 내용을 편집하여 방송하였다.
방송국에서 박세우는 "일인다역"으로 방송이며 편집이며 엔지니어까지 혼자 다 맡아서 해나가면서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연변인민방송국(1951년 4월 개명)의 가장 나젊은 부국장으로 승진하였다. 국장은 연변지위 선전부 최채부장이 겸했다. 그 당시 최채부장은 방송국뿐만이 아니라 문공단 단장에 교육출판사 사장, 연변일보사 사장까지 겸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팔방미인"이였다. 그러니 사실상 방송국의 일은 전적으로 부국장이 관장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북경에 입성하다
백일승(현 제1아시아부 부주임)이 펴낸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 연혁에 의하면 중국 중앙방송사업국은 1950년초부터 대외조선어방송을 추진하였다. 원래 그해 4월 10일에 시험방송을 하고 10월에 정식방송을 시작하기로 계획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것이 아니였다.
그해 6월 25일, 조선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정세의 수요로 중국대외조선어방송은 계획보다 석달 앞선 7월 2일에 전파를 타게 되였다. 부대 출신인 송진명과 모 부대 지도원으로 있던 김성철, 중-쏘우호협회 간사였던 김광수 등 세분이 먼저 방송을 시작하였다. 방송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분들이였다. 이 또한 전란의 특수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가싶다.
그해 12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아나운서 리련숙과 리성삼, 번역담당 림영춘이 전근되여오면서 방송이 제 궤도에 들어서게 되였다.
1951년 11월, 연변인민방송국의 부국장으로 맹활약하던 박세우는 북경방송국(후에 중국국제방송국으로 개명) 일어조선어조 부조장으로 발탁되여 안해 리련숙아나운서의 뒤를 이어 상경하였다.
그때만 해도 조선족들의 중국어수준이 낮아 현지인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배우자를 찾는다는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였다. 그래서 여건만 허락되면 연변인민방송국에서도 되도록 부부를 북경으로 보냈다고 한다.
1956년 4월, 조선어조가 정식으로 설립되면서 박세우는 초대 조장으로 선임되였다. 그는 조선어방송의 질제고에 혼신을 기울였다. 부조장은 방송개시 당시 책임자로 있었던 김광수가 맡았다.
1963년, 박세우는 아시아부 부주임으로 승진한 동시에 조선어조 조장을 겸했고 아시아부가 제1아시아부와 제2아시아부로 나뉘면서 1973년에는 제2아시아부 부주임을 맡았다. 제2아시아부는 서아시아 나라들을 상대로 방송하는 언어부서들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조선어조는 제1아시아부에 소속되였다. 일본말에도 상당히 능했던 박세우는 1974년에 일어부 주임으로 발령받았다. 조선족이 일어부 주임으로 된다는것은 방송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1985년 8월, 박세우는 일본주재 수석기자로 파견되여 일본지국에서 2년간 활약하였다. 이 기간 박세우는 나까소네 전 일본총리를 망라한 일본의 정계인물들을 취재하면서 다시한번 방송인으로서의 긍지감을 느끼게 되였다.
박세우는 1988년 1월에 귀국한 뒤 일어부에 잠시 적을 두고있다가 1989년에 퇴직하면서 방송생활을 접었다.
취재 후기
박세우원로님의 건강 상황으로 취재일정이 여러차례 변경되면서 취재가 어렵게 잡혔다. 박세우원로님을 직접 만난후 많이 회복된 원로님의 모습을 보고 얼마간 안심이 되였다. 초창기 우리 방송을 이끌어나간 방송원로들이 건재해계신다는것은 우리 후배들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박세우원로님을 비롯한 모든 방송인들의 옥체건강을 재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