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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보람을 안겨준 대외조선어방송―베테랑방송인 윤봉현의 이야기(한창송)
2010-07-22 16:16:06 cri
윤봉현선생은 1964년 국제방송국에 전근되여 1990년에 조선어조 부조장, 1994년에 조선어조 조장을 맡으며 방송의 온갖 분야에 매진하여온 베테랑방송인이이다. 뉴스나 해설은 물론, 스포츠중계 또한 일품이였던 윤봉현선생, 정말 방송을 위해 세상에 태여났다고 할 정도로 방송에 혼신을 불태운분이다.

그때 그 사람들

저는 1964년 11월에 입사했습니다. 그해 7월에 전숙자, 김춘선, 신정자, 장원천 등 몇분이 먼저 왔죠. 원래 저도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전근될 때 같이 통지를 받았지만 방송국 사정때문에 11월 10일에 왔습니다. 그때 조선어부에 20여명이 있었는데 우리가 입사해 얼마 안되여 두분이 조선으로 나갔고 또 "문화대혁명"이 끝날무렵 최원부씨가 서울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 남조선으로 떠났죠.

한족인 리병성, 도원제가 중문편집으로 있었고 후에 길문도도 합세하게 되였죠. 이분들은 주로 중국어로 교환프로그람을 쓰고 보통때는 취재도 했죠. 예전의 특징을 보면 조선어부는 다면수가 아니였습니다. 방송원은 방송만 하고 번역원은 번역만 하고 취재는 주로 중문편집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쓴 중문원고를 우리가 다시 번역하군 했죠. 장점도 있었지만 조선말방송으로서 직접 조선말로 하면 더 자연스러웠을텐데 다시 번역하자니 어색한 점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방송은 번역과 방송이 명확히 갈라져있었고 일이 있건없건 번역원이 아무리 바삐 돌아도 방송원은 편하고 번역이 끝나고나면 방송원들이 또 팽팽 돌아치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번역도 하고 방송도 하고 이렇게 익혔더라면 전반 방송인들의 업무자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가싶습니다. 그때는 그런 상황이 아니였죠.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변화가 있었죠. 전 입사해서 처음 10년은 아나운서로 있었습니다. 저는 1961년 9월에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에 배치를 받았다가 한달 후에 아나운서로 발탁됐고 거기서 다시 아나운서로 국제방송국에 전근되여왔습니다. 그래서 방송만 10년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만 하다간 마지막에는 (배운것을) 다 까먹고 남는게 없지 않을가 생각해서 번역에도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번역하면서 방송도 하고 또 1970년대말부터는 취재도 나가고 예술단이 오면 예술단 취재, 체육대표단이 오면 체육기자로, 이렇게 차츰차츰 번역에 자리를 붙이고 1980년대부터는 취재를 많이 나갔죠.

이렇게 조선어방송 14년만에 우리 5명이 입사했고 1971년부터 시작해 서창술, 김태근, 리정옥, 김희남이 왔고 그후에 잇달아 최영수, 한정숙, 마걸, 왕덕문, 안옥화가 보충되면서 조선어조 인원수가 많이 확대되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죠. 그래서 조선어방송 55주년 때도 제가 얘기한적이 있지만 1970년대에 들어온분들은 대부분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정규적인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통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자기가 못배운것을 몇년만에 다 보충했습니다.

특히 연변대학 통신학부를 다니면서 업무에서 완전히 탈리하지 않고 공부를 했는데 업무 제고에 대단히 큰 효과가 있었죠. 그래서 그 당시는 모두가 부지런히 공부하는게 특징이였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김태근선생은 도서관에 거의 파묻혀있다싶이 했고 과외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군 했죠. 이런것들이 나중에 다면수로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된것이죠. 이 1970년대분들은 대부분 전면적인 인재로 발전했습니다.

그뒤로는 정규대학 졸업생들이 차츰차츰 들어왔죠. 례하면 백일승, 리선옥, 박명국, 김호림, 김금철, 김철, 김동광, 주정선 이렇게 새로운 일대 대학생들이 많이 보충됐기때문에 조선어부 업무 제고에 많은 도움이 됐고 또 확실히 젊은 사람들이 아주 빠르게 제자리를 잡았죠. 이때로부터 취재수준이 예전보다 훨씬 제고됐고 번역효률, 언어규범화 등 면에서도 큰 발전을 가져왔죠.

권총 찬 책임자

제가 입사할 때는 김성철선생이 조선어부를 관장했습니다. 특히 조선어부가 1950년 7월 2일에 설립되자 김성철선생이 부대에서 권총을 차고 경호원 2명을 데리고 방송국에 들어왔는데 아마도 우리 방송 3사(CRI, CNR, CCTV)에서 권총을 차고 경호원 2명을 거느리고 방송국에 입사한 사람은 이분밖에 없을거예요.

김성철선생으로부터 옛날 얘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 와서 한달 동안 경호원들이 할 일이 없었죠. 그때는 김성철선생도 직접 방송에 번역까지 했습니다. 경호원이 할 일이 없게 되자 한달만에 부대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국제방송국 앨범을 보면 김성철선생이 군복을 입고 모자까지 눌러쓰고 국장이랑 같이 사진을 남긴게 있어요. 그 사진을 보면 우리 조선어조도 아주 영광스러운 부서라는 자긍심이 생기죠. 특히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일주일만인 7월 2일에 조선어방송을 시작하게 되였으니까요. 초창기에는 조선중앙방송국의 아나운서 두명이 국제방송국에 와서 2년쯤 아나운서로 있다가 조선반도 정전후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어요.

서툴렀던 중국어수준

예전에는 모두 중국어실력이 약한편이여서 우리 조선어조분들의 작품은 아예 국제방송국 우수작품평의에 오를수가 없었죠. 우리 말을 다시 번역해 옮기자면 아주 힘들었죠. 제가 연변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한족이 없었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되던 해부터 한어학과, 물리학과에서 한족학생들을 모집했죠. 그래서 우리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어학과와 련락을 취해 짝을 지어 조선어와 중국어를 서로 배워주군 했죠. 우리는 예전에 중국어를 잘 익히지 못했죠.

그러다가 우리가 국제방송국의 1등상, 전국방송업계의 2등상을 받았지요. 그때가 1994년 새해맞이특집방송때였죠. 그때 제가 조선어조 주임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저와 백일승 부주임이 힘을 모아 제가 기획, 연출을 담당하고 백선생이 집필하고 본격적으로 더 세련되게 악단도 초청하여 공연도 하고 했는데 그 작품이 나중에 국제방송국 우수작품평의에서 1등상, 전국방송 2등상을 받았죠.

제 기억으로는 이때로부터 조선어조가 련속 국제방송국 우수작품평의에서 상을 받아안았어요. 특히 백일승선생과 김동광선생이 지도층에 있던 시기에 우리때보다 더 많은 수의, 더 높은 급의 상을 받았는데 제 생각에 조선어조의 수상이 이때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잊을수 없는 스포츠실황 중계방송

조선어방송이 국제방송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것은 아시안게임때였습니다. 1990년 9월에 있은 북경 제11회 아시안게임때 축구실황을 위주로 롱구, 배구 중계방송을 했죠. 제11회 아시안게임은 중국 최초의 성대한 스포츠제전이였는데 북경에서 처음으로 개최됐기때문에 방송에서도 큰 중시를 돌렸죠. 방송국에서는 먼저 학습반을 꾸렸고 잇달아 시험도 쳤어요. 먼저 8개 언어조에서 실황방송을 신청했어요. 제 기억으로는 일어, 조선어, 영어, 중국어 등 8개 언어부서였는데 일부 언어부서는 후에 기권을 했죠. 학습반을 조직하고 시험을 치는데 저의 시험관은 그때 중앙인민방송국 초대 축구실황중계 아나운서 장지였습니다. 그분은 전국적으로도 아주 유명한분이였죠. 스포츠전문가로는 방송대학 체육교사 백용기선생을 청했어요.

시험형식은 예전의 월드컵때 쏘련팀과 독일팀간의 경기록화물을 15분 보여주고 쏘련을 중국으로, 독일을 조선으로 가정하고 15분간 경기실황방송을 하게 하는것이였습니다. 국제방송국의 지도층과 각 부서의 주임들도 모두 참가했죠. 그래서 신나게 가상중계를 해나가는데 5~6분 정도 됐을 때 멈추라고 하더군요. 이때 중앙인민방송국의 스포츠중계 방송원이 "내가 조선말은 모르지만 당신의 진행을 보면 스피드, 격정, 전달형식, 감정표현 모두가 적절하다는감이 든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러면서 그분이 백용기선생한테 "당신 보기에 언어구사는 어떠한가?"라고 묻더군요, 그러자 백용기선생이 "이분은 원래 아나운서출신이기때문에 언어구사는 두말할나위 없다. 100% 정확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생방송자격을 얻게 됐습니다. 그때 제가 대표로 시험을 보고 나중에 저와 김태근선생이 모두 생방송에 나서게 됐죠. 저는 축구를 중계하고 태근선생은 배구경기를 중계했죠.

마지막 결승전은 조선과 이란의 대결이였는데 아시안게임 페회식전에 10만명 관객앞에서 이 결승전을 중계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어요. 이에 앞서 준결승은 웰남팀과 조선팀이 선농단경기장에서 경합을 벌여 조선이 결승전에 오르게 됐는데 준결승도 역시 중계방송을 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란팀 대 조선팀의 결승전이였는데 경기 전반 과정을 큰 실수가 없이 성공적으로 중계방송을 했죠.

지금 보면 그렇게 잘했다고 말할수도 없고 미흡한 점도 많았지만 성대한 경기실황을 생방송해보기에는 국제방송국사상 조선어조가 처음이였죠. 전에는 스포츠실황에 국제방송국 전체가 참여하기 힘들었죠. 하지만 아시안게임때부터 국제방송국도 실황중계방송 의석을 당당하게 차지하게 됐죠. 여기에 우리 조선어조가 한몫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르쎌로나 올림픽축구 분조별 예선경기에서 조선팀과 중국팀간의 경기를 또 선농단경기장에서 생방송했고 그뒤로 1991년 수도체육관에서 진행된 국제롱구선수권대회의 준결승전, 결승전도 생방송했죠. 제 생각으로는 그때는 비교적 잘했던것 같아요. 저는 축구중계를 하다나니 배구결승전에는 가보질 못했는데 태근선생도 방송을 참 잘했어요. 배구와 롱구를 중계했죠. 그래서 아시안게임때 실황방송으로 조선어조가 국제방송국의 1등상을 받았죠. 개인상이 아니라 단체상을 받은거죠.

다음 하나는 제가 참여한 국제롱구선수권대회 생방송을 우수작품평의에 보냈는데 그 당시 수도 35개 보도부문이 함께 참가했죠. 그 평의에서 우리 작품이 실황방송부문 2등상을 받았어요. 저와 태근선생이 함께 2등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시아게임때 장원천선생이 조직하고 나, 백일승, 최영수, 리정옥, 김태근 이렇게 6명이 함께 특집방송을 만들었는데 역시 인기상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조선어방송이 스포츠에서는 인기를 끌어 독특한 일면을 이루었죠. 이게 가장 인상깊은 점입니다.

시사보도기자로 활약하던 시절

"잊을수 없는 외사취재" 자료에 의하면 조선어조의 첫 시사보도기자는 1971년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고 하는데 김성철선생의 말에 의하면 조선전쟁때 김성철선생이 이미 취재단으로 조선에 나갔답니다. 1964년에 김성철조장이 벌써 조선방송위원회에 가서 인원교류협정을 맺고 조선정전담판때에도 가서 취재를 했다고 해요.

제2차는 아마도 1978년 장원천선생과 한창희선생이 화국봉주석의 조선방문 수행기자로 취재를 나간게 아닐가 생각해요. 그때까지는 방송국에 시사보도기자라는 호칭이 없었죠. 국가지도자들을 수행한 외사취재였습니다. 그뒤로 조선어조의분들이 국가수반들의 외국방문시 수행기자로 많이 활약했습니다.

방송국에서 시사보도기자라고 이름을 확정한것이 아마 1985년부터였던것 같아요. 그때 제가 항주에서 제19차 아시아력도선수권대회를 취재하고있는데 호요방총서기의 외국방문 수행기자로 나가야 된다며 곧바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죠. 그래서 돌아와서 1985년 5월 3일부터 5월 7일까지 호요방총서기의 수행기자로 조선에 가서 취재를 했죠. 저도 몰랐는데 후에 알고보니 시사보도기자로 등록이 됐더구만요.

그뒤로 같은해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참전 35주년 기념행사가 치러졌는데 그때 리붕 부총리가 조선을 방문했었고 김일성주석과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행사에 참가한 중국기자들과 실무인원들에게 김일성주석이 친히 친선메달을 수여했습니다. 지금 방송국 전시대에 있는 친선메달이 바로 그때 받은것입니다. 김일성주석의 친필싸인을 받은것도 있었죠. 원래는 집에 소장해두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제 개인이 소장하는것보다는 조선어부, 나아가 국제방송국에 남겨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를 하는게 더 뜻깊지 않을가 생각해서 내놓았죠. 우리는 특수한 년대, 특수한 환경, 중국과 조선의 교류가 가장 활발할 때 취재차로 자주 조선에 나갔죠.

최상의 영광

제가 일생에서 최상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것은 1990년 10월에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강택민총서기와 양상곤주석, 리붕총리를 비롯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인민대회당에서 3,000명 대표를 접견할 때입니다. 그때 국제방송국 2명 대표중의 한사람으로 접견에 참가한것입니다. 제 한생에 등소평동지와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기자 신분으로 인민대회당에서 국가수반의 접견을 받는다는것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일입니다. 사진 찍은걸 보면 창해일속입니다. 내가 어디 섰는지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깨알같이 들어서서… 또 구태여 찾아볼 필요도 없지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두메산골에서 1960년대가 되여서야 비로소 전기가 들어와 라지오 소리를 듣던 "촌놈"이 북경에 와서 40년 방송사업을 하다가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도 받으니 참 감개무량합니다.

어느덧 60주년을

조선어방송이 어느덧 60주년을 맞는다고 생각하니까 이미 퇴직한지 10년이 되지만 생각되는바가 많습니다. 사람 나이 60이면 회갑이고 로년에 진입하지만 방송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세련되고 발전, 장대해지는 단계지요. 인터넷사이트를 볼 때마다 느끼는데 조선어부가 기술장비에서 완전히 현대적인 기술을 갖추었을뿐만아니라 젊은 직원들도 자질이 뛰여나 대학을 졸업하고 몇해만 지나면 자리매김하는것 같아요.

정말 개혁개방 30년을 맞으면서 중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것처럼 조선어부도 업무나 여러 차원에서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죠. 60주년을 맞으면서 새삼 기쁨과 긍지를 느낍니다.

퇴직후 여가생활

이젠 퇴직한지 10년이 넘는군요. 1998년 12월말에 퇴직하여 1년 6개월간 연장근무를 하다가 2000년 2월 30일에 정식으로 방송일에서 손을 뗐으니 지금까지 옹근 10년이 됐습니다. 강산이 또 변했습니다. 비록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한평생 방송사업에 종사했기때문에 지금도 매일 국제방송국 인터넷사이트에 접속하군 합니다.

조선어사이트는 현재 북경에 2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국제방송국 조선어홈페지에 접속하여 오늘 뉴스가 뭔지, 조선어부에 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2000년에 조선어부를 떠나서 한동안 허전했죠. 물 떠난 고기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방송국 퇴직간부처에 정을 붙이면서 2001년부터 당지부 조직위원으로 6년간 있었고 2007년부터는 지부서기로 3년간 있으면서 상장도 받았죠. 지금은 또 촬영에 큰 매력을 느끼고있습니다. 사진촬영으로부터 시작하여 2008년부터는 캠코더 록화, 비디오 제작도 전문 배웠죠.

ᐳᐳᐳ

렌즈를 통해 또 다른 세상 모습을 찾아보는 윤봉현선생, "인생 칠십 고래희"라는 말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는 이분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언어의 "전령사"로 남달랐던 윤봉현선생, 항상 밝은 모습으로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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