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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방송이 중국국제방송 발전에 한 기여―장원천선생의 회고록(한창송)
2010-07-22 16:17:24 cri
장원천선생은 1965년에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조에 입사하여 1983년에 조선어조 부조장으로 승진하고 1987년에 조선어조 조장으로, 1990년에는 아시아부 부주임 겸 조선어조 조장을 맡는다. 아울러 장원천선생은 중국국제방송국 초대 시사보도기자, 중국국제방송국 한국지국의 초대 기자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어방송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왔다.

2010년 7월 2일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이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인생을 놓고 말하면 환갑이죠. 저도 중국국제방송국에서 조선어방송을 위하여 30여년간 근무했다는데서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964년에 연변한어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졸업배치로 북경방송국(현 중국국제방송국)에 왔습니다. 그해에 5명이 같이 왔습니다. 당시 리련숙아나운서가 입사시험관으로 연변에 왔는데 제 기억에는 입사시험을 여러차례 봤던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3학년 후학기라서 실습을 나갔는데 학교 선생님이 방송국에서 직원 모집하러 왔다고 부르시더군요. 그때 멋있게 생긴 아주머니(리련숙아나운서)가 와서 시험을 봤는데 실은 북경에서 오신줄도 모르고 시험장에 들어갔었습니다.

그 당시 300명 가까이 응시해서 결국에는 신정자와 김춘선, 저 이렇게 3명이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1965년 3, 4월이라야 졸업을 하는데 국제방송국 입사시험에 통과되여 졸업전에 오다보니 졸업사진도 없고 졸업증도 없습니다. 그외 두명중 윤봉현은 이미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3년을 근무하다 전근되여서 오고 다른 한명은 전숙자였습니다. 그분은 중앙민족학원(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룡정제1중학교에 배치됐는데 남편인 한창희가 방송국에 있어 남편을 따라 국제방송국에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1964년에 5명이 동기로 방송국에 입사했습니다.

우리가 입사하던 1964년, 그때 조선어부에는 직원이 14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운데 한족이 3명, 번역원, 편집이 6명, 방송원 2명, 조장 1명, 청취자 서신담당이 2명 있었습니다.

그때 한족편집이 좀 많았던 원인은 1959년부터 조선중앙인민방송과 교환프로를 만들었는데 한주일에 30분씩 우리가 만든 프로를 조선중앙방송에서 방송하고 조선에서 보내온 중국어프로를 우리쪽에서 방송했거던요, 이 교환프로그람때문에 한족편집이 많았습니다.

저희들이 와서는 오래동안 인사변동이 없었고 1972년에 또 아나운서로 김태근, 서창술, 리정옥 세명이 입사했습니다. 그뒤로 1975년에 5명이 추가되였습니다. 그 5명으로는 안옥화, 왕덕문 그리고 장춘의 조선어방송이 해체되면서 국제방송국으로 전근되여온 최영수, 한정숙, 김희남이였습니다. 그후부터는 한해에 한두명씩 입사하게 됐죠. 1990년대에 조선어부 직원이 제일 많았습니다. 25명이 됐으니까요. 지금은 비교적 리상적이죠. 인터넷까지 합쳐서 26명 정도면 충분하죠.

중국국제방송사에 길이 남을 조선어방송의 기여

(1) 방송국 중계방송사 개척에 기여

첫번째는 중국국제방송국의 생방송 력사를 조선어방송이 열어나간것입니다.

그중 하나로 1960년 4월 28일, 그때는 남조선이라고 했는데 남조선 마산시를 비롯한 전 지역에서 리승만독재를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지지 성원하는 성대한 집회가 천안문광장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60만명이 모였었죠.

이 행사를 중앙인민라지오방송국과 북경텔레비죤방송(현 중앙텔레비죤방송)사에서 중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중앙에서 "이 행사 자체가 남조선인민들을 위한 행사인데 조선어방송이 꼭 실황중계해야 한다."라는 결정을 오전 9시에 내린것입니다. 오후면 당장 시작되는 행사를 4시간의 준비끝에 리련숙아나운서가 생방송을 하게 됐습니다. 조선어조 조장이였던 박세우의 회고에 의하면 그 당시 준비된 원고란 고작 공회책임자의 연설문뿐이였다고 합니다. 하여 조선어조에서 번역이 베테랑이였던 박창식이 천안문광장 중계석에 있는 텔레비죤 화면을 보면서 직접 번역하여 옮겨쓴 원고를 리련숙아나운서가 받아 곧바로 방송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각본 없는, 진땀 나는 생방송이였습니다. 박세우조장은 그 당시 현장지휘를 맡았습니다.

또 하나는 스포츠실황 중계방송입니다.

1990년에 북경에서 진행된 제11회 아시안게임때였습니다. 개, 페회식 중계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사전에 원고가 나오고 혹 원고가 없다고 하더라도 리허설 내용을 보고 원고를 얼마간 체크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구경기는 모든것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때 우리 조선어조의 윤봉현과 김태근이 주로 스포츠 생중계를 했습니다. 두분 모두 아주 잘했습니다. 국제방송국 력사에서는 처음이였죠. 그후 또 1995년 천진에서 있은 세계탁구선수권대회도 상급의 지시에 의하여 개회식을 중계했는데 리정옥과 김태근이 방송하고 저는 현장지휘를 책임졌고 윤봉현도 같이 지휘를 했죠.

(2) 수행기자 자리매김에 기여

두번째는 시사보도입니다.

이것은 아마 국제방송국 력사에 길이 남을것입니다. 그때는 국제방송국에 전문시사보도팀이 별도로 있는것이 아니였습니다. 1978년, 당시 당중앙 주석이였던 화국봉의 조선방문이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금방 끝난 뒤였죠. 그래서 당중앙에서 이 보도를 충분히 하기 위해 TV는 물론 라지오 방송도 수행기자를 파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국제방송국에 이 명액이 차례지게 됐습니다. 그 당시 국제방송국에 시사보도팀이 없었기때문에 결국 조선어부에서 기자를 파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와 한창희가 가게 됐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방송국책임자가 특별히 찾아오셔서 이번 과업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이번 임무수행의 성공 여부에 따라 앞으로 중국 국가수반의 외국방문시 수행기자로 갈수 있느냐 없는냐가 결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충분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했기때문에 그후에 있은 화국봉주석의 유럽순방에도 국제방송국 기자들이 수행기자로 나갔고 그후부터 각 언어조마다 시사보도기자가 나오게 됐습니다.

조선어조의 첫 수행기자로는 제가 나갔고 그뒤로 윤봉현, 백일승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주석의 중국방문시 제가 또 수행기자로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3) 중조친선에 기여

그리고 또 하나는 조선어방송이 중조친선 교류에 크게 기여한것입나다. 이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1980년대는 모든 주제가 중조친선이였습니다. "친선의 메아리"라는 프로그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중조친선을 소개하면서 제가 3년을 거쳐 특별히 펴낸 글들이 있습니다. 항일유격대 전적지를 찾아서, 김일성동지가 중국에 와서 공부하던 곳부터 무송현, 길림시육문중학교, 반일유격대 창건지 안도 소사하, 소왕청 등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취재기를 썼습니다. 3년을 했습니다. 조선에서도 제가 취재한 내용들을 뉴스로 많이 취급했었죠.

인상적인것이라면 제가 무송현을 취재하면서 김일성동지의 은인으로 불리우는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을 만나게 된것입니다. 장울화는 조선에서 아주 높게 평가하는분이죠. 김일성동지가 늘 "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라고 얘기했던분입니다.

무송현에 취재차로 나갔다가 장금천씨를 만나게 되였는데 그 당시 그는 무송현문화관의 관장으로 있었습니다. 취재를 통하여 이분과 인연을 맺게 되였고 나중에 또 제가 이분과 김일성동지의 상봉을 주선해주었죠. 장금천씨가 김일성동지한테 쓴 편지를 제가 번역하여 북경에 있는 조선대사관을 통해 김일성주석에게 전해드린겁니다. 그때가 1984년 여름이였는데 10월경에 답복이 왔습니다. 이듬해에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씨와 딸 장금록, 큰손자 장기 세명을 특별히 초청한다는거였지요. 그래서 이분들이 1985년에 초청되여 조선에 가게 되였고 김일성동지의 따뜻한 접견을 십여차례나 받았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나중에 세분이 귀국한후 제가 또 후속 취재기 "잊을수 없는 나날, 감동적인 화폭"을 썼는데 조선 ≪로동신문≫에 큰 편폭으로 실렸습니다. 이는 단적인 례입니다. 그 당시 저뿐만아니라 조선어방송에 근무하는분들 모두가 중조친선을 위해 기여했습니다. 모두가 공로자입니다.

한국지국으로 가다

저는 1983년부터 조선어조 조장직을 맡았고 1990년에는 조선어조 조장과 아시아부 부주임을 겸하였습니다. 조선어조와 완전히 리탈된것은 1996년 한국에 특파원으로 가면서부터였습니다. 1996년 3월에 갔죠. 사실은 서울보다는 평양에 먼저 지국을 두기로 하고 제가 1990년대초에 임명을 받았는데 그 당시 여러가지 원인으로 무산됐었죠. 그때 조선에 상주한 외신기자들로는 인민일보사의 기자 1명, 신화사 기자 3명, 로씨야기자 2명 그리고 꾸바기자가 있었죠. 꾸바기자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겸직으로 취재하고있었기에 한명으로 취급하지 않고 반으로 취급한것입니다.

귀국후에는 아시아부가 아니라 방송국에서 갓 설립한 영상사업단에서 단장직을 맡았습니다. 회사의 법인대표와 사장으로 있었죠. 그것이 후에 만들어진 중국국제방송국 양성쎈터―아카데미의 전신이였습니다. 그때 제가 아카데미의 법인대표와 교장을 겸했었죠. 그때부터는 조선어조와 리탈됐습니다. 2004년에 정년퇴직했습니다.

1965년, 조선어방송이 14살 되던 때부터 46살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소년기부터 불혹지년, 청장년 시기를 함께 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는 잊을수 없는 나날들이였습니다.

ᐳᐳᐳ

장원천선생은 조선어부의 력사를 반추해보면 지금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조선어부를 떠난지도 어언 10여년이 되지만 그동안 조선어부의 움직임을 손금보듯 파악하고있다. 급변하는 미디어환경속에서 인터넷의 앞으로의 전망, 승패가 걸려있다며 전통방송뿐만아니라 인터넷을 충분히 활용하는 대책을 타진해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 장원천선생, 조선어방송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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