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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방송의 "량사령"―량윤철선생의 이야기 (한창송)
2010-07-22 16:18:37 cri
량윤철선생은 옹근 10년을 조선어조의 방송모니터편집으로 활약하면서 동료들로부터 "량사령"이라 불렸다. 이 별칭은 조선어방송에서 량윤철선생이 담당했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극명하게 나타내고있다.

입사계기

저는 1956년에 연변한어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국제방송국에 입사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방송이 시작된지 6년째 되던 해였죠. 졸업을 앞두고 방송국에서 인원모집을 하게 되여 졸업배치로 방송국에 오게 된것입니다. 지금처럼 시험 보고 들어온게 아니였죠. 방송원은 여러가지 시험을 보지만 나는 방송원이 아니라 번역원으로 왔으니까 그런 절차가 없었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모집하러 나간 선생이 그냥 저의 학교 성적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선정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3명이 함께 입사했습니다. 저외에 박창식과 최금란이 있었죠. 최금란씨는 방송국에 2, 3년쯤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박창식씨는 1990년에 타계했죠. 바로 제가 퇴직하는 해였습니다. 1990년에 퇴직하여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량사령"시절

제가 왔을 때는 박세우선생이 조장으로 있었습니다. 방송국에 갓 와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약 1년간의 견습기를 마치고 1957년말 조직의 수요에 의하여 전문 검열사업(모니터)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저는 일을 세심하게 하는편입니다. 그 당시 여러차례 발생한 방송사고에 대비한 타개책으로 륜번식검열을 취소하고 전문인원검열제를 실시한것입니다. 대책이 세워졌으니 이제는 인원을 지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조장들은 비록 입사한지 1년밖에 안되지만 매번의 검열업무를 침착하고 빈틈없이 완성하여 안전방송을 믿음직하게 보장한 나에게 이 과업을 맡겼죠. 그래서 번역을 잠시 그만두고 거의 10년을 검열원으로 있었습니다. 그 뒤로 많은 방송사고를 피면했죠. 방송원의 록음과정도 감청하고 번역 원고도 중문을 보면서 검열하고 혼자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나갔죠.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자꾸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게 되였습니다. "방송원 이번에는 누가 들어가시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량사령"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죠. 그때 일하면서 제일 어려웠던것은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친것이였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루에 만자가량 방송이 됩니다. 그러면 그 만자를 전부 검열하고 또 감청을 해야 하니까 마지막에는 눈이 다 시려나고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좀 안타까운 심정이였죠.

안전방송을 보장하는 마지막 관문이라 할수 있는 감청작업에는 위험이 동반되지요. 자칫 잘못하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지어는 방송사고로까지 이어질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잠을 설칠 때도 많았습니다.

어느날 밤에 벌어진 일입니다. 중대한 새 소식을 접하게 되여 이미 방송되기 시작한 프로를 중단하고 그 중간에 중대한 뉴스를 록음하여 삽입할 준비를 서두르고있었습니다. 먼저 여러 번역원들이 원고를 나누어 짧은 시간내에 솜씨있게 번역하고 아나운서는 그 원고를 받아들고 방송 청사 2층에 있는 록음실로 가면서 읽어보고…드디여 방송록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고가 좀 길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여서 테프 두판에 갈라 록음하기로 했죠. 첫번째 판은 송출실에 보내여 송출하고 이어 방송될 두번째 판을 계속 록음했습니다. 방송록음을 다 마친 뒤 나는 두번째 록음테프를 들고 4층 송출실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사이 뜻밖에도 첫번째 판이 다 송출되여 방송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사업을 면밀히 짜고 하는편이라 각별히 자신있던 내가 어이하여 이처럼 큰 과오를 범했는가고 자신을 수없이 나무랐죠.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깨여보니 꿈이였습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여나왔습니다.

이렇게 옹근 10년을 검열원으로 있다가 "문화대혁명" 후기에 와서 번역원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였습니다. 방송국에 있는 기간 방송대표단 일원으로 조선에 갔다온적이 있습니다. 1964년, 방송기술대표단의 조선방문시 통역으로 나갔었죠. 그때는 한국과는 련계가 별로 없었으니 한국에는 가보질 못했구요, 조선에는 세번 정도 다녀왔습니다.

수도 북경에 대한 인상

1956년에 방송국에 입사하면서 처음으로 수도 북경에 오게 됐죠. 북경시에 대한 특별한 인상은 없었습니다. 그땐 지금처럼 고층건물이 많았던게 아니고 거의다 옛날집이였고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그 당시 제일 화려한 건물이 천안문, 신화문이였을거예요. 제가 수도에 와서 일하게 된데 대해 집에서는 물론 모두 출세했다고 생각했죠.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방송국에 입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깐요. 사범학교였으니까 교편을 잡게 되는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해 여름에 홍수가 나는바람에 통일배치 통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겁니다. 그때 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모 중학교에 한어교원으로 이미 배치된 상태였어요. 그런데 국제방송국에서 이 사람은 우리가 데려가겠다고 하여 북경에 오게 됐죠. 당시 사범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소학교 교원으로 배치받았습니다. 성적이 괜찮은 사람들이 가끔 중학교선생으로 배치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드물었죠. 중앙기관에 들어간 사람은 더더욱 없었죠. 저 혼자뿐이였어요. 그때 전공으로 한어를 배웠는데 성적이 괜찮았습니다. 반에서 꼽히는 성적이였으니깐요.

6년이 60년으로

제가 1956년에 입사할 때 방송이 시작된지 6년째 되였는데 어느덧 벌써 60년을 맞이하는군요. 지금 조선어부의분들은 우리가 일할 때보다 업무량이 더 많고 더 수고하고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통방송뿐이였고 다른것이 있었다면 고작 조선과의 교환프로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방송시간도 늘어나고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방송도 하고있습니다. 그러니 매개물의 범위가 훨씬 넓어지고 업무량도 많아졌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더 수고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우리 조선어부 성원들이 더 많은 힘을 기울여 우리 조선어방송을 더 잘 꾸려나가길 부탁드립니다.

ᐳᐳᐳ

량윤철선생은 회고록에서 "당시 안전방송을 기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사업에 대한 최대의 평가였고 또한 최대의 성과였다."라고 적었다.

갈고 닦지 않고 빛나는것은 있을수가 없는것이다. 량윤철선생은 안전방송을 위해 기울인 노력으로 하여 동료들로부터 침착한 모니터, 믿음직한 "량사령"으로 인정받을수 있었던것이다. "량사령"은 지금도 여전히 "사령"으로 추대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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