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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을 아름답게만 보아오신분―신정자아나운서를 찾아서 (한창송)
2010-07-22 16:19:38 cri
1964년 방송국에 입사하여 1999년 12월 30일에 정년퇴직한 신정자선생은 장장 35년을 방송과 함께했다.

하지만 신정자선생은 한번도 자신의 방송이 마음에 쏘옥 들어본적이 없다며 첫 시작이 어려웠던 방송생활을 회고한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신정자선생도 기나긴 방송려정에 갖가지 어려움을 꺾으면서 국가급아나운서라는 아름다운 색채를 지니게 된것이 아닐가싶다.

기 자: 방송국에 입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신정자: 1964년이였는데 그때 윤봉현선생, 장원천선생, 김춘선선생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 왔어요. 그때 우리가 올 때는 21살이였을거예요. 저는 연길시 한어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연길길상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다가 국제방송국에 오게 됐죠. 그 당시 리련숙선생님이 아나운서 모집차로 연길에 왔었죠. 예술학교, 사범학교, 한어사범학교 그리고 여러 소학교 교원들을 상대로 정치적으로 믿을수 있고 목소리를 비롯한 천부적인 조건이 좋은 사람들로 물색을 했죠. 그때 30명 가까이 연변인민방송국에 가서 록음을 했어요. 주로 신문을 읽었죠. 나는 1차 시험에 통과된 20명 가운데 한명으로 2차 록음까지 무난히 들어갔고 나중에 리련숙선생님이 20명의 록음내용을 국제방송국에 갖고가서 전반 조선어조의분들이 함께 듣고 4명을 선정하는데 뽑혀 국제방송국에 오게 됐습니다.

기 자: 교원에서 아나운서로 전직하셨는데 그 당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했나요?

신정자: 그때 사실 아나운서도 아나운서겠지만 북경에 온다고 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했죠. 물론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죠. 오매에도 그리던 북경이였으니까요. 시골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수도 북경까지 온다는건 그 당시에는 정말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였죠. 기쁨과 신비로움이 교차되는 그런 느낌이였어요.

기 자: 정식 방송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신정자: 처음 와서 방송을 배울 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방송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었으니까요. 그냥 글을 읽는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런게 아니였어요. 정말 배울수록 힘들었죠. 지금 아나운서 후배들과 비해보면 우리가 노력은 정말 많이 했어요. 아침저녁으로 계속 읽고 발성연습을 하고 근무시간에는 또 선배들의 지적을 받고 정말 어려웠어요. 글을 읽는것도 아니고 말을 하는것도 아니고…

그때 우리 선배님들이 이야기하시는데 "절대 모방해서는 안된다, 자기 풍격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힘들없어요. 그런데 처음 배울 때는 남의것을 자꾸 흉내내게 되잖아요. 자기 풍격이 형성되자면 시간이 걸려야 돼요. 그속에서 자기 개성을 찾아야죠. 남의것을 모방해서는 발전하지 못해요. 그리고 방송을 반년 정도 연습한후 우리는 먼저 인사말록음부터 시작했어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북경에서 보내드리는 조선어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몇달이나 했죠. 그리고 뉴스를 차츰 시작하고 한단계한단계 오르는게 참 힘에 겨웠죠. 그리고 점차 프로그람을 맡아서 하고 마지막에는 번역도 좀 했어요. 시간이 좀 걸렸죠. 선배들의 요구가 높아서 정식으로 방송에 오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던것 같아요.

기 자: 방송을 하시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무엇라고 생각하시나요?

신정자:저는 그렇게 돌출한 성과를 내놓은것 같지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방송에 대한 태도는 좋았고 큰 착오가 없었고 조직에서 준 임무를 안전하게 완성한것뿐이죠. 퇴직한후 생각해보면 한번도 자기 마음에 든 방송이 없었던것 같아요. 방송을 듣는 청취자가 다차원이기때문에 방송에 대한 연구는 끝이 없어요. 지금도 방송에 대한 연구는 끝이 없고 성적을 한번 올린다는게 힘들다는 생각을 해요.

기 자: 가장 인상깊었던 방송사건이 혹시 있으세요?

신정자: 단계마다 다르죠.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이죠. 그때는 생방송이 아니고 록음을 한 뒤 다시 송출하는 식이였죠. 8시에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데 10분밖에 남지 않았죠. 그런데 방송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거예요. 그때는 아직 방송이 순탄하지 못할 때이지, 시간은 일분일초 다가오지, 마지막 뉴스를 마무리해야겠는데, 자꾸 발음이 되지 않아 더듬거리게 됐죠. 틀릴수록 긴장하고 긴장할수록 더 틀리게 되더군요, 그때 인상이 참 깊어요. 막 눈물이 났죠. 제 기억에는 아마 1분을 앞두고 방송이 끝났던것 같아요. 그리고 방송은 무난하게 나갔지만 나중에 생각할수록 속이 떨렸습니다.

기 자: 어떤 프로그람에 가장 애착을 가지셨나요?

신정자: 저는 중국의 경제건설 상황을 소개하는 "경제건설"프로와 소설랑독을 했죠. 소설은 "강태공"이 인상이 깊습니다. "경제건설"프로는 퇴직전까지 쭉 해왔죠.

기 자: 청취자들의 반영은 어떠했나요?

신정자: 그때 청취자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애청자들은 아주 적극적이였죠. 한국에서 온 편지중에는 친척을 찾아달라는 내용들도 있었고 중국에 대한 리해를 높여줄만한 내용을 부탁하는 내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기 자: 전에는 "만자 읽기 활동"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신정자: 우리가 오니까 리련숙선생님, 리성호선생님 시절에 이미 그런걸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한번도 틀리지 않고 만자 읽기" 식이였죠. 우리가 와서는 없었습니다. 매일 신문을 몇장씩은 읽어야 된다는 표준은 있었죠. 그때는 주로 조선의 ≪로동신문≫을 읽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오전 한시간, 오후 한시간씩 읽었어요. 그때는 일요일에도 휴식을 못했어요. 선배들이 숙제를 주니까. 원래 그런 법인줄 알았죠.

기 자: "문화대혁명" 전후를 비교해보면 방송이 내용이나 형식에서 변화가 크지요?

신정자: 제 기억으로는 우리가 조선에 가서 연수하고 돌아오니까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조선에서 배워온 그대로 방송을 했는데 문제가 됐어요. 억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거죠. 인상이 정말 깊게 남습니다. 그뒤로 저는 "5.7간부학교"에 갔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자진해서 갔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문제"있는 사람으로 그곳에 버려지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저는 3년을 거기서 보냈는데 그동안 신문 한장도 보지 못했죠. 그땐 사정이 그랬죠. 1968년에 갔다가 1971년에 돌아왔습니다.

기 자: 그 당시에는 왜 그곳에 자진해서 나가시게 됐나요?

신정자: 그때는 어린 나이에 아주 열성적이였죠. 열혈청년은 간고한 곳에 가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이였죠. 그런데 신문을 한장도 못 보게 됐으니까 그동안 혀가 굳어져 돌아와서는 방송을 해낼수 있을지 고민할 정도로 심각했죠. 영향은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면서 다시 방송을 시작했죠. 기반을 다져야 할 시기를 놓쳤으니까 곱으로 힘을 들여야 했습니다.

잃는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것이 있다.

"5.7"간부학교에 머무는 기간 본의 아니게 방송과 외면하게 되면서 최적의 시기를 놓쳤다고 하지만 "5.7"간부학교에 가는 차에서 신정자선생은 평생의 동반자를 만난다. 그분이 바로 중국레코드사의 유명한 록음기사 류회헌(刘怀轩)선생이다. 잉꼬부부로 소문난 신정자선생내외는 항상 서로 소중히 아끼며 살아가고있다.

기 자: 퇴직후 여가생활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신정자: 1999년에 건강이 허락되지 않아 퇴직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정말 어떻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을지 허무하기 짝이 없었어요. 계속 출근하고 바삐 보내다가 집에 들어앉게 되니 삶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이제 남은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가? 그런데 딸과 같이 있으면서 이젠 나는 내가 직장에서 할 일은 안전하게 마무리했고 이제부터는 딸과 사위를 위한 뒤바라지를 하는게 일면으로는 사회에 기여하는게 아닐가 하고 생각을 바꾸게 되였고 그러고나니 다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더군요. 퇴직한지도 이젠 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행복합니다. 모든것이 아름답게 보이기만 합니다.

기 자: 후배들에게 당부하시고싶은 말씀이 있나요?

신정자: 가끔 우리 방송을 듣고있는데 우리 방송원들이 모두 자기 개성이 있어요. 그게 좋은거예요. 갈팡질팡하지 않고. 우리 후배들이 방송에 대한 연구는 끝이 없다는 점을 념두에 두고 그리고 어디까지나 꼭 책임지는 태도로, 책임적으로 일하고 책임적으로 연구에 림할것을 부탁하고싶습니다. 그러면 꼭 큰 성과를 이룰것입니다. 후배들이 앞으로 많은 성과 이룩하고 방송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나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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