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직전인 1949년 9월, 도문시 석현진 송림촌에서 태여난 서창술아나운서는 중학교때 이미 광선라지오를 만들어내여 무선전에 남다른 기질을 드러낸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밤의 장막만 드리우면 쥐죽은듯 조용한 시골에서 촌민들의 여가생활을 조금이나마 다채롭게 해드리기 위하여 서창술아나운서는 현모범으로 선정되여 받아안은 큰 상―라지오를 서슴없이 개조해 유선방송을 시작한다.
웬만한 기계고장은 서창술아나운서의 손만 거치면 수리된다는 입소문이 주변에 퍼지면서 서창술아나운서는 도문시에까지 불리워다니며 재주를 뽐낸다. 재간둥이로 불려지던 1967년 도문시방송국에 입사하고 1972년에는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전근되여 베테랑아나운서로 발돋움한다. 아래는 서창술아나운서와의 인터뷰다.
기 자: 그때 북경에 갓 오셨을 때 조선어방송은 어떤 상황이였나요?
서창술: 그때 남자는 리성호선생, 녀자는 리련숙선생 두분이 주로 방송을 맡아했고 이외 장원천, 윤봉현 선생도 그전에 방송을 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온 다음에는 방송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녀성분들로는 김춘선, 신정자 그리고 오정숙 등 몇분이 방송을 했죠. 그중에서도 특히 리성호선생님은 방송을 참 잘했죠. 이런 훌륭한 방송원들이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 자: 현지적응은 쉽게 되셨나요?
서창술: 공교롭게도 북경에 오자마자 저는 피부병으로 고생했어요. 얼굴이 "문둥이"가 돼버렸어요. 북경의 물이 저의 체질에 맞지 않았던것 같아요. 그래서 거의 반년 동안 약을 복용했는데 중약, 서약 모두 써봤지만 별 효험이 없는거예요. 원래 입사하여 1년이 채 안되면 휴가를 주지 않는다는 방송국 규정이 있었지만 특별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니까 거짓말처럼 이튿날에 대뜸 괜찮아지더라구요. 약도 안 먹었는데…그리고 다시 (북경에) 돌아오니까 괜찮더라구요.
기 자: 그때 도문시나 홍광공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셨다는데 갑자기 북경에 오셔서 아시는분도 없고 생활적으로도 적응이 잘 안되셨을텐데 혹시 후회한적은 있으세요?
서창술: 1972년에 갓 왔을 때는 북경생활이 엄청 힘들었습니다. 우리 그때 로임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죠. 고향에서보다 1원 많은 42원을 받았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는 받은 로임에서 우리 어머니가 20원을 몰래 가져가도 몰랐어요. 고향에서는 돈 쓸 일이 별로 없었죠. 저는 초기에 주로 뉴스를 했는데 국제방송의 특성상 청취자반응이 바로바로 오지 않으니까 방송을 하는것 같지 않았어요. 도문에 있을 때는 참 재미있었어요. (방송을 하면) 곧바로 반응이 오니까…또 여러가지로 적응이 안되여 돌아가려고 정식보고서를 여러번 썼댔어요. 사표를 여러번 냈는데 계속 안 받아주는거예요. 후에는 여러장 되는 사표를 저에게 한꺼번에 돌려주더군요.
기 자: 마음을 어떻게 다잡으셨어요?
서창술: 1974년에 "5.7" 간부학교에 내려간게 계기가 됐죠. 솔직히 그때는 도문도 농촌이나 마찬가지였죠. 이런 곳에서 뛰여다니던 사람이 매일 사무실에 앉아있고 인테리들속에 있으면서 아무나 가까이 할수도 없고…이게 제일 힘들었어요. "5.7"간부학교에 갔다오니까 북경과 다른 도시의 격차가 눈에 보이더군요. 북경이 좋아보였던거죠. "5.7"간부학교에 갔는데 그곳은 하남성에 있는 가장 빈곤한 곳이였어요. 원래는 1년 있어야 하는데 두달 앞당겨 돌아왔어요. 그곳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니 몸이 형편없이 망가진거예요. 한번은 쓰러지기까지 했죠. 그래서 2달 남기고 돌아왔어요. 그후로는 피부병도 차차 나아져가고 역시 북경이 괜찮구나 하고 생각됐죠. 그리고 주위의 도움도 많이 받았죠.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만큼 느낀다."고 방송을 하면 할수록 서창술은 자신의 부족한 지식에 한계를 느끼며 중앙민족학원(현 중앙민족대학) 연수반에 이름을 올린다. 1978년부터 2년간 중앙민족학원의 연수과정을 마친 서창술은 곧바로 조선중앙인민방송국 연수차로 조선행 렬차에 몸을 싣는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서창술은 방송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의 방송은 소설랑독을 시작하면서 절정을 이룬다.
기 자: 선생님의 소설랑독이 인기가 대단하셨다고 들었어요. 가장 인상 깊은 소설작품이 있나요?
서창술: 조선에 갔을 때 라지오를 들었는데 참 재미났어요. 류경애아나운서가 소설랑독을 잘해요. 지금도 가끔 듣습니다. 류경애아나운서가 화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도 예전에는 소설프로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코너를 1983년부터 다시 살린거죠. 저는 주로 작품에 많이 치우쳐서 작품속의 인물을 어떻게 살리겠는가를 중시했죠. 그러다보니 ≪삼국연의≫ 같은 작품은 청취자들이 편지를 많이 보내왔어요. 주로 한국에서 많이 왔지요. 그때가 1980년대초였어요. 한국에서는 남자라면 ≪삼국연의≫를 꼭 봐야 하고 지어는 ≪삼국연의≫를 읽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삼국연의≫를 한번뿐만아니라 두번, 세번씩 본대요. 책을 본 사람도 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죠. 자신이 책을 보고 리해한것과 비교해 이야기를 들으니까 새롭다면서요. 그러면서 인기가 올라간거예요. 소설랑독은 선을 잘 잡아야 돼요. 장편소설일수록 선이 많아요. 그때는 젊었으니까 힘든줄도 몰랐고 기억력도 좋았고…그러니까 거의다 기억한후 다듬어서 그 선을 잘 이어놓았죠. ≪홍루몽≫, ≪수호전≫, ≪삼국연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5천년 력사이야기≫ 등등…퇴직전까지 줄곧 해왔죠.
기 자: 40여년간의 방송생활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일은요?
서창술: 제일 처음에 광선라지오로 우리 방송을 들었어요. 그때 리성호아나운서를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방송을 들었죠. 그때 수신할수 있는 국내방송은 연변방송, 국제방송 국내 조선어방송이 이 두개였죠. 그리고 조선방송도 듣고…들을 때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느꼈어요. 어쩜 세상 일을 저렇게 다 아느냐고요. 제가 힘들 때 온 편지가 있는데 "그 소설을 봤습니다. 봤기때문에 선생님의 소설을 더 듣고싶었습니다. 마치 인물이 살아 숨쉬는듯 생동했습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면서 작품중 인물을 잘못 리해했는데 선생님의 방송을 듣고 다시 옳바르게 인물을 인식하게 됐습니다."라는 내용이였어요. 인상이 깊죠.
기 자: 후배들에게 당부하고싶은 말씀이 있나요?
서창술: 옛날 우리가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에 비해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가 방송의 전성기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때는 다른 매체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후 북경에 오니까 그땐 텔레비죤방송이 나왔어요. 텔레비죤방송이 나오면서 청취자가 그쪽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최근에는 인터넷이 나오면서 인터넷이 인기몰이를 하고있습니다. 이런 도전에 맞서 새로운 매체를 잘 리용해나가는것이 라지오방송의 생명을 이어나가는거죠. 너무 전통방송에만 얽매이면 어렵겠죠. 방송인이라면 누구든지 방송프로그람에 신경을 써야 돼요. 새시대, 새로운 매체에 걸맞게 훌륭한 방송을 꾸려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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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30일에 이미 정년퇴직했지만 이분은 아직도 늘 바쁘다. 인터뷰 내내 걸려오는 전화에 답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퇴직했다는걸 실감하지 못하고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 아닐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