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를 챈 리정옥선생은 올해 5살인 손녀가 무용콩쿠르에서 받은 전국상과 북경시급상이라며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 상들을 훑어보는 우리 취재진 일행은 "축복받은 유전자"라는데 입을 모았다. 일찍 리정옥선생도 방송국에서 노래며 춤이며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팔방미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니까…
리정옥선생은 손녀의 안무에서부터 의상, 소품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도맡았다고 한다.
다재다능한 리정옥아나운서, 중국국제방송국에 발을 들여놓으며 그의 아나운서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그때가 1972년 6월이였다. 그러나 반추해보면 "밭머리 신문랑독" 시절이 이미 그 시작이 아니였나싶다.
"그때 제 나이가 겨우 17살이였습니다. 일하면서 쉴참이면 밭머리에서 농민들에게 신문을 읽어주군 했죠." 특수했던 "지식청년 하향" 시절, 화룡현 숭선향 하천촌에 내려가 일하던 시기를 떠올리며 리정옥선생이 하는 말이다.
아마 그것이 "대패질을 하기 위해 대패날을 가는" 시기였을것이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언제나 행운이 오는 법이다.
1971년 가을의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밥보자기를 호미에 달아매고 밭으로 향하던 리정옥선생은 중앙에서 아나운서모집을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을사람들의 권유와 축복을 받으며 10여리길을 수차 왕복하며 시험을 치르게 된다. 궁극적으로 리정옥선생은 입사시험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국제방송국 아나운서로 당당하게 상경한다.
"1972년 6월이였죠. 제가 영광스럽게 국가급아나운서가 되여 마이크를 잡게 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사랑하는 방송사업에 혼신을 기여할 각오를 하고 공부에 박차를 가했죠."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학교 문턱밖에 넘지 못한것이 한이 되였던 리정옥선생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5년을 거쳐 연변대학 통신학부 수업을 마쳤고 틈틈이 시간 나는대로 표준발음법을 익히고 호흡훈련을 하고 랑독연습을 하는 등 업무자질 제고에 여념이 없었다.
리정옥선생의 말을 빈다면 그때는 길을 걸으면서도 넋 나간 사람처럼 혼자 표준어를 중얼거렸고 주위 시선도 잊은채 호흡훈련을 하다가 눈총을 받은적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옥돌같은 고운 목소리"를 타고난데다 업무자질 제고에도 게을리하지 않은 리정옥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에서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하며 간판아나운서로 맹활약한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중국 최초의 스포츠제전인 제11회 아시안게임, 제43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등 굵직굵직한 행사의 생방송임무를 훌륭히 완수하면서 리정옥선생은 중계방송 특급상, 1등상, 국제방송국 우수사원상을 받아안는다.
업무에서 항상 완벽함을 추구했던 리정옥선생이지만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유감이 많다고 한다. 아시안게임때는 보름 동안 수차 중계방송이 계속되는 강행군을 하면서 체력저하를 실감했고 제16차 당대표대회 중계방송시에는 공교롭게도 감기에 걸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그때 저는 아나운서는 정치 및 사상적인 각오가 되여있어야할뿐만아니라 체육인 못지 않은 건강한 신체와 체력도 갖고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아나운서의 자세, 음성, 발음 등 아나운서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리정옥선생의 아나운서삶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있다.
국가급방송국의 아나운서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은 길을 걷고있는 순간에도 잊어본적이 없다는 리정옥선생, 2008년에 이미 정년퇴직했지만 아직도 정년퇴직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리정옥선생은 방송생활이 몸 깊숙이 배여있어 지금도 책을 보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소리내여 "방송"을 하게 된다며 그럴적마다 기분이 참 좋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아끼고 키워준 방송국에 감사하다고 거듭 말한다.
"자꾸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자꾸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한다. 리정옥선생에게도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