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소개
게시판
조선어부 소개
 
cri korean.cri.cn/
"왕서방네 코리아사랑 대장정" (김호림)
2010-07-22 16:39:03 cri
수십개 어종의 "련합국"인 중국국제방송국에 인구가 스물대여섯명에 불과한 "소국"이 있으니 일명 "조선말방송부"이다. 이곳 "국민"들은 다른건 몰라도 조선어에는 저마다 본토박이들이 혀를 홰홰 내두르게 한다. 그래서 이 방송부에 들어서면 마치 평양이나 서울의 어느 한 오피스텔에 서있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와중에 뭔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유표한분이 있는데 바로 왕씨성의 "국민"으로서 그야말로 서울 종로거리에서 난데없는 "왕서방네 호떡집"을 본듯한 코믹한 느낌이다.

왕덕문(王德文), 이 이름은 그가 한족임을 추호의 감춤이 없이 여실하게 드러내보인다. 왕덕문의 부인도 한부서에서 근무하고있는데 안옥화라고 하는 이름자에 조선족냄새가 다분히 풍기는건 물론이요 연변 특유의 사투리까지 구사하는바람에 그들 부부를 "국제혼인"커플로 착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데 안옥화 역시 왕덕문처럼 "오리지널" 한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난세기말, 부서에서 여러해 함께 근무했던 조선전문가 류경철선생님도 오랜후에야 안옥화가 한족인걸 알았다는 일화가 있다.

워낙 한부서에 부부동반 직원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조선족들이 대부분인 조선어방송부에서 "한족부부"는 더구나 전대미문의 풍속도이다. 진짜 그림이라면 그게 유일무이한 작품일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 "작품"은 일찍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그때 중국인의 외국어인재 육성이 당면한 과제로 나섰던것이다. 왕덕문과 안옥화 부부는 그 시대의 행운아였다.

그때 왕덕문은 룡정현 태양공사(지금의 향)정부에서 공청단위원회 지부서기로 있었고 안옥화는 화룡현 와룡공사(지금의 향)정부에서 부녀주임으로 있었다. 두 마을은 수십리나 떨어져있었고 또 산과 강을 사이에 두고있었다. 20대의 이 한족 총각과 처녀는 그때까지 서로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나중에 부부로 될 천생인연이 있었던지 서로 비슷한 경력을 갖고있었다. 다른건 둘째로 치고서라도 둘 다 조선족마을 태생이였으며 이때문에 조선말에 아주 능숙했던것이다.

기어이 차이를 따지자면 조선말을 배운 시점이 다른것이였다. 왕덕문은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간후 조선족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때부터 조선말을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안옥화는 조선족마을에 이사왔던 다섯 살 때부터 동갑내기들과 어울리면서 조선말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족마을에서 부녀주임으로 발탁된 경력에서 안옥화의 그때 조선말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수 있겠다.

"그리고 그때 조선글을 읽을수 있었어요."

안옥화의 회억에는 부단히 긍지감이 묻어나고있다. 진짜 한족치곤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사례였다. 아무튼 조선말이 그들을 북경행 렬차에 탑승하게 하고 나중에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한 연줄로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때 연변으로 조선어방송 직원모집을 내려간 책임자는 중앙라지오방송사업국 대외부(현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조 조장으로 있었던 김성철옹이였다. 김성철옹은 왕덕문을 직접 만나 구두시험을 보고 안옥화는 육성록음을 듣고 당장에서 채용을 결정했다고 한다. 현지의 조선족들처럼 달변인 그들 둘의 조선말수준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던것으로 보인다.

5월 8일은 왕덕문과 안옥화에게 모두 행운의 날자로 기억되고있다. 1972년, 그들은 북경 제2외국어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하게 된다. 바로 이날 그들은 입학하여 서로 면목을 익히게 되였고 이때부터 주악된 련가가 6년만에 결혼식장의 축배가로 이어진다.

3년 동안의 학교생활은 드디여 중앙라지오방송사업국 대외부 조선어조의 정식입사로 이어졌다.

왕덕문은 처음 방송문 번역을 맡았을 때 난감했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문물과 관련한 번역은 정말 까다로왔습니다. 무슨 단어를 써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지요."

진짜 원고더미를 안고 아예 무덤으로 뛰여들어가고싶은 심정이였다고 한다.

조선말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구두통역에서도 물이 내리흐르듯 그렇게 쉬운게 아니였다. 처음으로 평양에 중국기자협회의 통역으로 나갔던 안옥화는 상대측 오랜 경력의 통역원으로부터 배울게 정말 많았다고 거듭 말한다.

"나중에 통역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그때의 일을 잊을수 없어요."

번역이나 통역에서 제기된 하나하나의 난제들은 오히려 그들 부부를 더 높은 수준에로 오르게 하는 촉매제로 되였다. 지난 시간 그들이 수집한 어휘만 해도 전방위적인 "사전"으로 되였고 이제는 그들뿐만아닌 부서 인원들의 번역에도 일조하고있다.

잠간 짚고넘어가야 할 점은 왕덕문과 안옥화가 한부서에서 근무했지만 약간은 다른 경력을 각자의 프로필에 기입했다는것이다. 안옥화는 약 1년 반 동안 조선에 있으면서 평양 조선중앙방송에서 연수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등 조선의 흔적을 깊이 남겼고 왕덕문은 몇년간 선후로 한국주재 중국방직품총회사 대표부 직원,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과학기술처 1등 서기관으로 차용되는 등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맺은것이다.

일력으로 한장한장 계산하면 1만 하고도 또 1천여장, 왕덕문과 안옥화가 조선어방송부에 몸 담은 35년을 몇자의 글에 담아낸다는건 불가능함 그 자체이다. 일상의 방송문 번역과 편집을 제외하고 수백만자에 달하는 영화, 다큐멘터리, 국가지도자들의 발언문 등 문헌자료의 번역 그리고 국내외 대표단과 유명인사의 구두통역 등으로 제목만 해도 한다발이나 되기때문이다. 다행히 아마cb어번역 직함으로부터 교수격인 역심(译审)까지 이른 경력에서 그들의 화려한 성과를 륜곽적으로 대충 그려볼수 있을것이다.

중국에서 조선말 덕분으로 교수까지 하는 한족은 얼마나 될가. 왕덕문과 안옥화는 또 조선말만 얼음에 박 밀듯 하는게 아니다. 음식습관도 비슷해 그들을 더는 조선어부의 "이방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들의 식사메뉴에는 조선족이 즐기는 김치와 토장국이 자주 오른다. 배추김치를 새콤새콤하게 절이는 그들의 솜씨는 일품으로 지금까지 주위에 정평이 나있다. 와중에 왕덕문은 부서 조선족직원들의 앞장에 나서서 "야외개고기파티"를 제안해 화제거리로 된적 있으며 안옥화는 언제인가 연변식 "순대"를 만들어 부서에 갖고나와 조선족들의 음식솜씨를 무안하게 만든적 있다.

아닌게아니라 이들 부부는 너무 "조선족"이여서 오히려 한부서의 조선족직원들이 샘을 낼 정도이다.

"이 사람들은 정말 건방을 떠네. 조금은 한족인척 하면 안되나? 원."

사실 그보다 더 샘나게 하는건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도록 열기가 식지 않는 이들 부부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이다. 그들은 날마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를 막론하고 마치 밀애를 즐기는 젊은 커플처럼 함께 다니면서 좀처럼 떨어질줄 모른다. 부서에 있는 그들의 좌석도 가지런히 어깨동무를 하고있다. 정작 놀라운건 그뒤의 이야기이다. 왕덕문은 1989년부터 1년 사시장철 새벽수영을 했는데, 다들 이건 왕덕문 혼자의 유일한 취미인줄로 알았더니 10년 전부터 안옥화도 이에 가세해 "부부동락"의 모습을 자랑했다.

천만 아쉽게도 조선어방송에서 이들 부부는 인제 한단락의 력사로 남게 된다. 조선어방송 "회갑잔치"에 즈음하여 이들 부부가 모두 정년퇴직을 하기때문이다.

그런데 이 퇴직이 뭐 "왕서방네 호떡집"에 불 아닌 경사라도 된건지 이들 부부는 맨날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거리낌없이 드러냈던것이다. 퇴직한다고 일부러 기쁜 모습 보이려고 저러는가 하고 주위에서 다들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결국은 그들의 본의와는 "십만 팔천리"나 떨어진 착각이였다. 얼마전 그들 가문에 영광의 제3세가 고고성을 터뜨렸던것이다.

사실 북경에서 살고있는 딸과 사위도 한국의 명문대에서 석사과정까지 밟은 지한파(知韩派)이다. 왕덕문과 안옥화 부부의 뒤를 따라 2세까지 조선말과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있는것이다. 이런 남다른 연분을 타고난 외손녀 역시 언제인가는 조선말로 종알거리며 온 가족이 "코리아"의 붐에 가세하지 않을가. 그러고보면 "왕서방네 코리아사랑 대장정"은 또 새로운 시작을 하고있는것이다.

  관련기사
  리플달기
   Webradio
선택하세요
cri korean.cri.cn
  추천기사

[차이나는 중국] 바오쯔

꿈의 마을 조원

새해가 왔어요~

영상으로 보는 제2회 중한성장지사회의

제2회 중한성장지사회의 베이징에서 개최
중국각지우편번호중국각지전화코드편의전화번호호텔
China Radio International.CRI. All Rights Reserved.
16A Shijingshan Road, Beijing, China